나의 주장/사법

법의 의미와 우리의 선택

박찬운 교수 2015. 9. 28. 20:53
[경향논단]법의 의미와 우리의 선택

법을 공부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법의 진정한 의미를 최근에서야 깨닫기 시작한다. 고시공부를 할 때는 법은 주어진 것이라 생각해 법의 철학적 의미는 관심 밖이었다. 그저 학설과 판례를 외워 주어진 법을 해석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 가면서, 더욱 학교에서 미래의 법률가들에게 법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다보니, 법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법을 어설피 알 때는 빈곤은 무능하고 게으른 자의 죄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그는 배를 곯으면서도 가게에 산더미처럼 쌓인 빵을 가져가지 않을까. 배가 고프면 손을 뻗어 그것을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포기한다. 왜? 법 때문이다. 그가 가게에서 돈을 내지 않고 빵을 가져오는 순간 법은 눈을 부라리며 빵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한다. 만일 이를 무시하면 법은 가차 없이 그를 차가운 감방으로 밀어 넣을지 모른다. 결국 빈자의 탄생은 법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자의 탄생 또한 빈자의 탄생에서 오는 반사이익이다. 법이 지켜주지 않는 한 부자는 쌀 한 톨도 자신의 창고에서 지킬 수 없다. 그러니 돈 가진 이여, 기고만장하지 말지어다!

법의 힘은 미국의 서부개척에서도 발견된다. 네바다주는 척박한 사막지대다. 살 만한 곳이 아니다. 땅은 넓으나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네바다를 만든 선조들은 한 가지 묘안을 짜냈다. 법을 이용하자! 이들은 연방국가에서 각 주에 허용한 입법권을 최대한 이용했다. 청교도 국가인 미국에서 도박을 허용하고 이혼을 쉽게 하는 법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라스베이거스다. 이 도시가 만들어지자 미국 전역에서 도박하고자 하는 사람, 이혼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 왔다. 농장도 공장도 없는 불모지대가 갑자기 불야성을 이루었다. 아, 위대한 법이여!

법의 이런 힘 때문에 법을 차지하고자 하는 경쟁은 언제나 치열하다. 어쩌면 역사는 법의 진정한 주인을 가르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치 공동체가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 것도 결국 법을 둘러싼 투쟁의 결과가 아닌가. 법을 1인이 독차지하면 군주정이 되는 것이고, 다수의 시민이 차지하면 공화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자유는 법을 사회 전체 구성원의 소유로 돌리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법이 일부의 전유물인 한 구성원 전체의 자유는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 역사가 말해주는 자명한 법칙이다.

이제 이 땅의 현실을 보자. 우리 헌법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법의 주인이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법은 어느 한 사람의 독점대상이 아니며 모든 국민의 일반의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라 법의 현실이 과연 그런가? 입법 과정에서, 집행 과정에서, 그리고 법을 심판하는 과정에서 주인인 국민의 뜻이 제대로 관철되고 있느냐 말이다.

재벌그룹 회장, 이 나라에서 이들은 어떤 권위도 도전하기 힘든 지엄한 존재, 절대왕정의 군주와 다름없다. 대부분의 재벌이 불법변칙 상속으로 경영권이 승계됐음에도 법은 무력하다. 그 오만은 국민의 도덕관념을 위협한다. 

얼마 전 삼성 이건희 회장은 만인 앞에 상속다툼 속에 있는 형을 향해 “형은 자신에게 이름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상대”라며 막말을 뱉지 않았는가. 내곡동 대통령사저 사건,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이러한 권력형 비리에 우리 검찰이 제대로 진실을 밝혀낼까. 신뢰보다는 불신이 앞서는 것은 검찰의 업보다. 권력이 법 위에 군림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는가.

4년에 한 번 국회를 바꾸고, 5년에 한 번 대통령을 바꾸는 것은 이 나라에서 법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법이 주인의 뜻을 받들지 못하면 그 정치공동체는 파산한다. 지난 4월의 선택은 아쉬움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남은 12월의 선택, 이 나라의 민초들은 과연 자신이 법의 주인임을 누구를 통해 확인할 것인가. 후회 없도록 눈을 부라리며 찾아 볼 일이다.(경향/2012. 5.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