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사법

무죄의 조건

박찬운 교수 2015. 9. 28. 20:47
[경향논단] 무죄의 조건
지난 10월27일 한 노인이 대법원 1호 법정 피고인석에 섰다. 무거운 정적이 흐른 뒤 재판장으로부터 짧은 한 마디가 들렸다. “검찰의 상고를 기각한다.” 피고인에게 무죄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 주인공은 올해 78세의 정원섭씨다. 실로 얼마만인가. 1972년, 그의 나이 39세에 일어난 사건이니 꼬박 39년 만이다.

법률가인 내가 아무리 자료를 뒤져봐도 이런 사건은 처음이다. 간간이 정치적 사건에서는 30여년이 지난 다음에도 재심이 이루어져 무죄가 선고된 적이 있지만 일반 형사사건에서 40여년이 지난 다음 재심에서 무죄가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러니 이 사건을 한 개인의 감격으로만 대하기에는 너무도 아깝다. 조금 살펴보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기록보존기간이 넘어 사건기록마저 남아 있지 않았던 이 사건이 어떻게 망각의 바다를 항해하여 무죄의 항구에 도착했을까. 

과거 형사변호로 이름을 날린 어느 고명한 변호사께서 이런 글을 남겼다. “법정에서 무죄를 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첫째, 사실 자체가 무죄여야 한다. 진실을 은폐해 무죄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둘째, 좋은 판사를 만나야 한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하소연한들 판사가 쇠귀에 경 읽기 식으로 나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셋째, 좋은 변호사를 만나야 한다. 피고인이 아무리 무죄를 호소하고, 좋은 판사를 만났다 해도 변호사가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결코 피고인은 무죄가 될 수 없다.” 진실여부는 사실 피고인 본인과 신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 오판 가능성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줄이기 위해 정교한 사법제도가 있는 것이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역시 진실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 사법제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최종 판결문에서 언급했지만 정씨는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고, 그로 말미암아 원심판결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1970년대 초 경찰은 정씨를 갖은 방법으로 고문해 살인범이라는 자백을 얻어냈다. 하지만 우리의 사법제도는 무고함을 호소하는 피고인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가 15년이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다음 천신만고 끝에 1999년 재심을 청구했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재심은 기각됐다. 결국 사법부에서 진실을 밝히는 것에 한계를 느낀 정씨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이 사건을 과거사정리위원회로 가져가 마침내 그곳에서 진실을 규명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사법부에 다시 재심의 문을 두드렸고, 그것이 대법원의 최종 무죄판결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천신만고라 한다. 하지만 이 사건을 돌아보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바로 사람이다. 고문사건을 만들어낸 것도 사람들이었지만 결국 진실규명도 사람들이 해냈기 때문이다. 의로운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정씨가 진실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70년대 이 사건의 항소심 및 상고심 변호인은 재판과정에서 이 사건이 무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낱낱이 밝힌 서면을 남겨 놓았고, 공식적인 기록은 폐기되었지만 수사기록 및 재판기록 대부분을 복사하거나 필사해 보관함으로써 이 사건 진실규명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99년 이후 정씨를 지원한 변호인들은 정씨의 무고함을 믿고, 사건 현장을 비롯해 전국을 누비며 증거를 찾아냈고 긴 세월 동안 정씨의 곁을 지켰다. 몇 몇 언론사는 특집기사로, 특집방송으로 이 사건을 재조명해 사법부에 진실 발견을 촉구했다.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담당자들은 정씨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이 사건의 진실을 추적했다. 이 모든 것이 합해져 진실이 규명됐고 난공불락의 사법제도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그 중심에는 정씨 본인이 있었다. 그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싸워 마침내 햇빛을 보았다. 그에겐 진실규명이 신앙이었다. 정씨에게 박수를 보내자. 그의 치열한 삶, 빛나는 승리에 아낌없는 격려를 보내자.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고백하면, 나는 이 사건 변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경향/2011.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