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기타

대충주의, 결코 한국인의 DNA가 아니다

박찬운 교수 2015. 9. 27. 04:54

<대충주의, 결코 한국인의 DNA가 아니다>

상가에서 귀한 분을 만났다. 이성낙 선생. 이 분은 독일에서 공부하여 의학박사가 되었고, 이후 귀국하여 한국의 유명 의과대학의 교수로 일하다가 가천의대 총장으로 은퇴하신 우리나라 최고의 피부과 의사 중 한 분이다.

그런데 내겐 피부과 의사로서가 아니라 우리 고미술과 관련하여 각인된 분이다. 나는 이분을 오주석이 쓴 <한국의 미>를 읽다가 알게 되었다.

오주석이 조선 후기 초상화 <이채 초상>과 <전 이재 초상>이 사실 두 사람이 아닌 한 사람 이채를 그린 초상화라고 말할 때, 그것을 피부과적으로 감정한 분이 바로 이성낙 선생이다.

백문이불여일견! 초상화 「전 이재초상」과 「이채초상」을 보자. 둘 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 이재초상」은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이재의 초상화로 알려진 작품이다.

그렇지만 그림 어디에도 이재의 초상화란 말이 없다. 그저 이재의 초상화로 전해오는 작품이다. 오래 동안 고미술 학자들 사이에서는 초상화의 주인공이 진짜 이재인지 의견이 분분하다.(그래서 ‘전’이란 글자가 붙어 다닌다.)

「이채초상」은 작품상으로 이채의 초상화임이 분명하니 위와 같은 논란은 없다. 만일 「전 이재초상」이 전해오는 대로 이재의 초상화라면 이채는 이재의 손자가 되고, 여기에서 보는 두 작품은 할아버지(이재)와 손자(이채)를 따로따로 그린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오주석은 이들 초상화가 인류 회화를 통틀어 최정상급 초상화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초상화로 유명한 렘브란트를 빗대 그의 초상이 이 그림들보다 낫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고 한다. 예술 수준으로는 분명 최정상의 예술품으로 렘브란트에 한 치도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오주석이 이들 초상화를 보면서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 초상화들이 극사실주의에 입각해 인물의 절대적 존재감을 그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들 초상화는 그림의 주인공을 앞에 두고 그것을 그대로, 절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주석이 「전 이재초상」에 대해 표현한 부분을 읽어보자.

"……노인 피부의 메마른 질감이 분명히 느껴지죠? 그리고 이 수염의 묘사가 정말 놀랍습니다. 내려오면서 이리저리 꺾여지는가 하면 굵고 가는 낱낱의 수염이 비틀리면서 굵었다 가늘었다 합니다. 이런 표현, 지금 현대 화가들은 도저히 흉내도 못 냅니다. ……더구나 이 수염들은 그냥 붙어 있는 게 아니라 피부를 뚫고 나왔지요! ……속눈썹이며 눈시울이며 동공의 홍채까지, 서양화에서도 보기 어려운 극사실 묘사입니다. 언뜻 서양화가 굉장히 사실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세부는 우리 옛 그림이 더욱 사실적입니다." <한국의 미> 171~172쪽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오주석이 「전 이재초상」은 이재의 초상화가 아니라 그의 손자인 이채의 노년의 모습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했을까. 그것이 재미있다.

오주석의 집요한 관찰과 그에 기초한 전문가의 감정이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 모두가 그림의 사실적 묘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주석은 두 초상화 주인공의 이목구비가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얼굴 학자인 당시 서울교대의 조용진 교수에게 감정을 의뢰한다. 그 결과 두 초상화의 주인공은 해부학적 동일인임이 밝혀진다. 이목구비의 비례수치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당시 아주대 의대 교수이었던 이성낙 선생에게 의뢰하여 두 초상화의 피부과적 소견을 들어본다. 그 결과 귓불 앞의 점이 같을 뿐만 아니라 눈가며 이마의 주름까지 같고 게다가 노인성 피부병인 검버섯도 같은 곳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니 이 두 초상화는 한 사람을 그렸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채초상」은 그 초상화의 주인공이 분명 이채니 두 초상화 모두 「이채초상」이 되는 것이다.

사실화, 특히 초상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실적이다. 극사실화가 많다. 그러나 우리 조선의 극사실화는 세계 어느 나라의 극사실화로서의 초상화와도 다른 경지다. 한마디로 엄정한 회화 정신의 표현이다.

얼굴의 흐릿한 검버섯마저 그대로 그리는 진실성이 우리 초상화에는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중국의 초상화가 사실적이라고 해도 병명을 진단할 정도로 사실적이지는 못했다. 겉보기는 같지만 조선과 중국 사이에는 엄밀성에 있어 그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에게도 이런 철저함이 있었다. 결코 대충 대충 일하는 성격이 우리 한국인의 DNA는 아닌 것이다. 소위 대충주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격동의 세월을 보내면서 만들어진 문화현상이다. 각종 대형사고는 이런 문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재앙이다.

세월호의 재앙도 바로 이런 대충주의의 산물이다. 지금 이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단식으로 투쟁한다. 이번만은 제대로 된 진상규명을 하고 거기에 맞는 대책을 세우자는 몸부림이다. 인류 회화 사상 최정상급 수준의 초상화를 그렸던 우리 조상의 엄밀함과 철저함을 상기한다면 우리가 못할 것이 무엇일까?

마지막 한 마디. 우리나라 문화의 우수성을 빼어난 안목으로 말과 글로 전했던 오주석은 지금 이 땅에 없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5년의 일이다.

한 마디 부연. 피부과 의사 이성락 선생은 최근 서울의 모 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나이 78세. 조선시대 초상화 500점 이상을 피부과적으로 모두 분석했다 한다. 세계미술사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다. 노익장! 경의를 표한다.

참고로 위의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나의 책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제15강 '우리에게도 자랑스런 문화가 있다'를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전 이재 초상화> 이재는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이다. 이 초상화는 이재의 초상화로 전해지나 오주석은 그의 손자 이채의 말년 초상화라고 주장하였다.


<이채 초상화> 정조, 순조 때의 학자 이채의 초상화다. 수염과 옷에 걸려 있는 장식을 보라, 얼마나 엄밀하게 그렸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조시대의 극 사실주의 회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초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