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이태리기행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가다

박찬운 교수 2015. 10. 3. 11:42

물의 도시 베네치아를 가다

 

20121 29일 오후 베로나를 떠난 기차는 베네치아를 향해 달렸다. 저녁 무렵 기차는 중세 이후 대학도시로 유명했던 파도바를 거쳐 베네치아로 이어지는 바다로 들어섰다. 석양에 비치는 베네치아 섬들이 눈앞에 들어왔다. 한 마디로 충격이다. 어찌하여 인간이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베네치아는 어쩜 인간을 교만하게 만드는 곳이다. 도시 자체가 불가능에 도전하여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인간 위업의 상징이다! 5세기 말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탈리아 반도는 혼란에 휩싸인다. 그 때 북쪽에서 또 다른 거친 민족이 이탈리아로 다가온다. 훈족이다. 이 훈족 중 아틸라가 지휘하는 부족이 가장 강력하고, 가장 야만스러웠다. 사람들은 이들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그런 곳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급기야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바다다. 적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곳, 자연이 준 난공불락의 장소, 그곳은 바다 한 가운데였다. 밀물이 들어 올 때는 완전히 바다지만 썰물일 때는 거대한 뻘이 드러나는 곳. 그들은 이 지형을 이용하여 말뚝을 박고 조금씩 땅을 만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 견고한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그것이 6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베네치아는 땅에서는 도통 먹을 것이 나올 수 없는 사회였다. 그래서 그들은 일찌감치 장사에 손을 댄다. 지정학적 이점을 살려 비잔틴 제국과 아프리카에서 향신료 등을 가져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 파는 소위 중계무역을 한다. 여기에서 베네치아는 엄청난 부를 챙기게 되고 12세기 이후에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해상 도시국가로 부상한다

리알토 다리에서 본 그랜드 캐널(사진 위키피디아)

 

11세기 말부터 시작된 십자군 전쟁에서도 베네치아는 큰돈을 번다. 수송수단인 갤리선을 베네치아만큼 가지고 있는 국가는 유럽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에 베네치아는 수송선단을 내주며 임대료를 챙겼다. 그 뿐만인가, 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십자군을 동원하여 비잔틴 제국을 약탈해 수많은 보물을 베네치아로 가지고 왔다.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전쟁을 통해 베네치아가 약탈한 전리품들이 오늘날 베네치아의 최고 보물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베네치아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기차는 드디어 베네치아의 관문 산타루치아역에 도착하였다.산타루치아역을 빠져 나오자 어느새 석양은 어두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역 바로 앞 수상버스 정거장에서 48시간 티켓을 구입하고 승선하자 배는 천천히 출발한다. 그래, 베네치아는 세계 관광지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육상 자동차가 없는 곳이지, 그러니 대중교통 수단도 배로 된 버스구나! 숙소가 있는 산마르코 광장까지는 직선 코스로 가면 20여분이면 갈 수 있을 텐데, 완행버스(배)인지라 이곳저곳 정거장에 서는 지라 시간이 걸린다. 

 

밤의 산마르코 광장

 

그렇게 거의 한 시간이 걸려 산마르코 광장에 도착했다. 가로등은 있지만 밤은 밤이다. 이제는 호텔 찾을 일이 걱정이다. 예상은 했지만 야간에 베네치아에서 이름 없는 호텔을 찾는다는 것은 고생 그 자체다. 수많은 골목길, 자칫하면 방향을 잃기 십상이다. 그 골목이 그 골목이다. 현지인에게 물어도 알려주는 사람마다 틀리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숙소를 찾았다. 유레카! 신에게 감사! 호텔은 밀라노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예약한 것인데, 비수기인지라 가격도 그렇고, 시설도 그런대로 괜찮다.

 

베네치아 관광의 정수, 두칼레 궁전과 산마르코 성당

1 30일 아침, 쌀쌀한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옷을 단단히 차려 입고 일정을 시작했다. 베네치아를 짧은 시간 내에 둘러본다는 것은 어쩜 고통스런 일이다. 그러니 한정된 시간 속에서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 많은 볼거리 중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베네치아에 도착하기 전 미리 알아둔  몇 곳을 찾는 방법으로 여정을 시작했다.

산마르코 광장의 종루, 산마르코 성당 및 두칼레

 

아무래도 베네치아 여정의 시작은 산마르코 광장일 게다. 한 때 세계 최고의 광장이라 불리던 이곳, 나폴레옹도 베네치아를 접수하면서 산마르코 광장에 들어설 때 이곳을 유럽의 우아한 응접실이라 했다던가. 두칼레 궁전은 지금은 박물관이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반인 도제(통령)가 집무한 관청이자 저택이다. 이 궁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6유로짜리 티켓을 사야지만 아깝지 않은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수많은 볼거리를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니 그저 몇 가지 본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자

우선 이곳에 가면 르네상스기의 여러 화가를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틴토레토, 카라바조, 베로네세 등이다. 이 중에서 최고의 인물은 틴토레토. 이 사람의 작품은 궁전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얼마간 보다 보면, 이 사람이 당시 베네치아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아마도 틴토레토는 당시 베네치아 최대의 공방 대표작가로서 수하에 수십 명의 제자들을 두고 그림을 그렸을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작품, 그 많은 대작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산 마르코 광장(사진 위키피디아)

 

산마르코 광장 ,  왼쪽은 종루 ,  중앙에 산마르코 성당 ,  오른쪽에 두칼레 궁전이 보인다.

 

틴토레토는 정청의 귀족들과 분명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다. 공공건물 여기저기에 그의 작품이 걸려 있는데 그 정도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능력 이상의 인적 관계가 있지 않고서는 어려웠지 않았을까. 정부 용역을 따내는 데 특출한 능력이 그의 그림 그리는 능력에 보태졌다는 말이다. 여하튼 이 사람의 최고의 대작은 두칼레 궁전의 맨 정상에 있는 대회의장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천국(파라다이스)(1588-1594)이다

두칼레 궁전에서 한 점을 더 소개한다면 안드레아 비센티노의 레판토 해전이다. 레판토 해전(1571)은 지중해의 기독교 국가들이 당시 욱일승천하는 오스만터키를 무찌른 역사적 해전이다. 이 해전의 승리로 말미암아 오스만터키는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걸어가게 된다. 바로 이 승전을 기념한 대작이 이 그림이다

두칼레 궁전의 대회의장 전면에 걸려 있는 틴토레토의 파라다이스

 

또 이곳에서는 심심치 않게 세기의 풍운아 카사노바에 관한 이야기도 들려온다. 카사노바는 이곳에서 풍기문란죄로 재판을 받고 두칼레 궁전에 부속한 피옴비 감옥에 갇히게 된다. 지금도 궁전 내부의 감옥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데, 카사노바가 감옥으로 갈 때의 심경을 느껴볼 수 있다. 물론 이 자유인은 용케도 난공불락의 이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가 건넌 탄식의 다리는 오늘도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탄식을 지르게 한다.

 

두칼레 궁의 탄식의 다리, 카사노바는 저 다리를 건너 감옥으로 들어갔다.

 

두칼레 궁전을 관람하고 나오면 바로 옆의 산마르코 성당을 가게 된다.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입장권을 사게 되는 데 성당만은 예외다. 적어도 성당 본당을 입장하는 것은 대부분 무료다. 물론 예외는 있다. 성당 내에 워낙 유명한 그림이 있는 경우는 입장료를 받는 경우가 있지만. 성마르코 성당도 본당 입장은 무료다

산마르코 성당(사진 위키피디아)

 

산마르코 성당

 

산마르코 성당은 베네치아 역사와 함께 하는 곳이다. 829 2명의 상인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산마르코의 유골을 가져와 이곳에 안치함으로써 이 성당은 시작된다. 이곳은 첫 인상부터 여느 이탈리아 성당과는 좀 다르다. 무엇인가 어디에서 본 듯한 인상이다. 그렇다. 이스탄불에서 본 비잔틴 양식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다

성마르코 성당은 이탈리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동서양(여기서 동양이란 비잔틴 문화를 말함) 문화의 절충형이다. 5개의 돔의 형태가 그렇고, 내부의 금박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의 성당에서 볼 수 있는 바로 그 모자이크다. 나는 지난 여름 이스탄불을 가서 그곳의 아야 소피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본 금박 모자이크가 바로 산마르코에서 그대로 볼 수 있다들리는 말로는 성마르코의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의 장인들이 와서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산마르코 성당 내부 천장 모자이크

 

성마르코 성당을 이야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전면 돔 아래에 설치된 4마리의 청동 말이다. 이 청동 말들은 한 마디로 수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이 청동 말은 그리스에 있던 것을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정하면서 그리스에서 가져 왔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제4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데, 이 때(1204) 이것을 가지고 와 성마르코 성당에 장식물로 사용한다

그런데 그것도 마지막이 아니다훗날 나폴레옹은 베네치아를 침공하면서 이 청동 말을 파리로 실어 나른다후일 이 청동 말은 베네치아로 다시 반환된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다. 지금 우리가 성마르코 성당에서 보는 것은 진품이 아니다복제품을 보는 것이다진품은 박물관에 가 있다.

산마르코 성당 전면, 청동 말 4마리가 보인다.

 

미술관 또 미술관, 성당 또 성당 그리고……

베네치아에 간 사람들이라면 꼭 들러 보아야 할 또 한 곳은 아카데미아다. 이곳에서 베네치아 회화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비잔틴 회화부터 르네상스, 뒤이어 바로크 그리고 18세기 작품들이 시대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내가 이번 여행 중 가 본 미술관 중에서는 피렌체 우피치와 팔라티나에 이어 최고였다. 그 많은 작품 중에서도  티치아노, 틴토레토, 벨레니 등의 작품은 이곳에서도 그 양이나 질에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압도한다.

그랜드 캐널(사진 위키피디아)

 

산마르코 이외에 가볼만한 성당은 많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이는 산조르지오 마조레는 당대의 최고 건축가인 팔라디오가 설계한 것인데 교회 내부에는 틴토레토의 걸작이 걸려 있으니 음미하며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대운하 초입에는 바로크 양식의 돋보이는 성당이 있는 데, 바로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트 성당이다. 전하는 바로는 17세기 초 페스트가 창궐하였는데 그것이 물러나면서 이를 감사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아카데미아 쪽에서 대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아카데미아 다리)에 올라  이 성당 쪽 운하를 바라다보면 베네치아 풍경 중 관광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절경 중 하나를 만난다.

오른쪽으로 멀리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트 성당이 보인다 .

 

베니치아 관광에서 뺄 수 없는 명소가 리알토 다리다. 대운하 한 가운데에 있는 이 다리는 베네치아의 영광이 모두 담겨 있는 곳이다. 베네치아가 한참 융성할 때인 16세기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설계공모에는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당대의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결국 싱글 아치 기법을 선보인 안토니오 다 폰테라는 건축가가 영예의 당선자가 되었다. 베네치아의 융성기에 이 주변에는 비잔틴 사람들과 아프리카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시장을 형성하였다. 동방으로 떠나는 배를 기다리는 선원들도 정든 임과 리알토에 올라 이별의 눈물을 흘리면서 뜨거운 포옹을 했으리라.

리알토 다리

 

베네치아의 광장과 카페

베네치아를 거닐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곳에 의외로 광장이 많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역사도시치고 광장이 없는 곳은 없지만 바다 위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보는 광장은 매우 특별히 보였다. 베네치아는 바다에 말뚝을 박아 만든 도시이기에 땅 한 뼘도 베네치아인들의 땀의 결정체다. 그러기에 땅은 귀할 수밖에 없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언뜻 보면 공한지라고 할 수 있는 광장이 그렇게도 많다는 사실에 나는 자못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네치아인은 셰익스피어가 쓴 <베네치아의 상인>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상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상인들의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익 남는 데에 관심이 있다. 그런 상인집단이 이렇게 많은 광장을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광장이 소통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에는 크고 작은  광장이 곳곳에 있다.

 

베네치아의 정치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공화정 체제였다. 물론 베네치아 주민 중 번듯한 상인집안들로 구성된 의회가 도제를 선출하고 원로원을 구성하는 체제였지만 이런 체제는 동시대 유럽 사회에서는 발견하기 힘들다. 아마도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데 광장은 필요 불가결한 소통수단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본다

소통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카페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자. 산마르코 광장 한 켠을 보면 유명한 카페 하나가 지금도 성업 중인데 그것이 1720년 개업한 카페 플로리안이다. 이곳은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와 있던 루소나 여행을 좋아했던 괴테, 심지어 나폴레옹도 애용했던 바로 그 카페다

카페 플로리안

 

하지만 유럽 사회에서 이런 카페는 무수히 많다. 프랑스 파리에는 그보다 먼저 개업한 카페 프로코프가 있지 않은가. 이들 카페는 단지 커피만 파는 커피하우스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의사소통의 장으로서 근대 사회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런 카페가 없이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일어날 수 없었으며 그 혁명의 기운이 다른 곳으로 전파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베네치아의 역사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그곳이 자유의 도시였다는 사실이다. 중세시절이나 종교개혁 이후 반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을 휩쓸 때도 베네치아는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누린 곳이고, 그러기에 유럽의 많은 사상가들이 이곳을 정치적 망명지로 택했다. 아마 이것도 상인도시의 특유한 유연성이 가져다 준 결과이었을 것이다. 신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유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쇄술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15세기 후반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개발하지만 이 기계가 제대로 활용된 곳은 베네치아다. 그 시절 유럽에서 출판된 상당수의 책은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이것을 말해 준다. 알도 마누치오라는 사람이 만든 알도 출판사는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인쇄술의 발달은 유럽 사상가들의 새로운 사상을 전파하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으니 베네치아가 근대 유럽을 만드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베네치아의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는 광장과 카페 그리고 인쇄소를 만나다 보면 그 모든 것이 베네치아의 역사를 구성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