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이태리기행

로마문명의 살아있는 박물관, 폼페이를 가다

박찬운 교수 2015. 10. 3. 17:34

로마문명의 살아있는 박물관, 폼페이를 가다




2008년 나는 사흘간 로마에 머물면서 로마의 이곳저곳을 돌아본 적이 있다. 그 때 로마를 떠나면서 다시 올 것을 결심했다. 로마를 그 정도로 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로마는 세계 최대의 야외 유적박물관이다. 피렌체와는 또 다른 맛이 나는 도시다. 그곳엔 로마문명의 유적도, 르네상스의 유적도 즐비하다. 때문에 로마에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한다. 적어도 로마문명에 대한 기초지식과 르네상스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들 없이는 로마를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제우스 신전


하지만 2012년 로마행의 주된 목적은 로마가 아닌 폼페이었다. 폼페이는 오래 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로마문명의 정수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곳 이상의 유적지가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로마문명의 유적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전역, 터키, 그리스, 중동지역,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등. 그렇지만 이들 유적은 그저 유적일 뿐이다. 그 지역 로마문명의 극히 일부를 알려주는 편린에 불과하다


폼페이? 거긴 확실히 그  이상이다. 이 도시는 화산폭발로 도시전체가 고스란히 땅 속에 묻혔다가 1500년이 지난 16세기 말 발견된 이래 도시 전체가 발굴된 것이고, 그 보존상태도 탁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마치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로마의 한 도시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로마인들이 어떤 도시문명을 만들어 살았는지를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대로 증거하는 것이다


20년만에 로마에 눈이 왔다. 이 눈으로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폼페이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2012년 2 3일 저녁 로마에 도착하니 눈이 이미 발목까지 찰 정도였다. 로마에 눈이 내리다니……. 전혀 상상을 못했다. 현지인들은 20년만의 폭설이라고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호텔을 찾아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캐리어가 눈에 빠져 앞으로 나가질 못하니 그 무거운 가방을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어물어 테르미니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호텔에 도착했다. 작지만 아담한 호텔이다. 침실은 더 없이 따뜻하고 침대의 쿠션은 피곤한 심신을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루 밤을 쉬고 아침을 서둘러 먹은 다음 나폴리행 열차를 타기 위해테르미니 역으로 달려갔다. 역은 얼마나 붐비는지 도저히 열차를 탈 수가 없다. 간밤의 눈으로 역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연착과 출발취소를 알리는 구내방송이 쉴새 없이  역 전체를 울린다. 나폴리 행 열차도 예외가 아니다. 정말로 21세기 선진국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니


그래, 눈 좀 왔다고 버스도 아닌 열차가 운행을 멈추는 곳이 현재의 이탈리아다. 로마인들이 이 장면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마도 지금 이탈리아인들을 자신의 후손으로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성이면 감천인가. 나는 끈질기게 나폴리행 열차를 기다렸다. 몇 시간을 기다려서야 간신히 나폴리행 특급열차에 올랐다. 하지만 이것마저 떠나질 않는다. 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겨우 기차는 움직였다.


베수비오 산


베수비오 산과 폼페이


나폴리 중앙역에 내려 다시 근교전차를 탔다. 운행한 지 수십 년은 되었는지 전차는 몹시도 덜컹거린다. 그런데, 얼마를 갔을까, 차창을 보니 큰 산 하나가 보인다. 베수비오다. , 저것이 그 산이구나. 서기 79 8 24일 불을 뿜은 바로 그 산. 베수비오는 나폴리의 뒷산이라고 보면 된다. 주변에 큰 산이 없으니 이 산은 나폴리 인근에선 우뚝 솟은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전차는 이 산을 멀리 보면서 해안가를 따라 폼페이로 달린다. 한 시간을 채 못 가 전차는 폼페이 유적지 바로 앞에 도착했다.


여름철이면 아마도 폼페이 유적지 주변은 인산인해일 것이다. 하지만 2월초, 이곳은 한산하다. 기십 명 정도의 관광객만이 보인다. 이탈리아 여행은 여름에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생각을 바꾸었다. 이탈리아 여행은 겨울에 해야 한다. 그래야 어딜 가도, 사람 대접받고, 여유가 있다.


폼페이 원형극장


로마제국 시절 폼페이는 나폴리 인근의 휴양도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구 2-3만명 정도의 폼페이는 온화한 기후와 주변의 바다로 인해 로마의 유력인사도 별장 등을 소유하는 품격 있는 도시로 발전했다. 그것은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각종 신전과 원형극장 등에서도 알 수 있다. 도시 전체가 바둑판처럼 잘 계획되어 있고, 길은 모두 돌로 포장되어 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매우 수준 높은 도시임이 분명하다.

 

길거리 이곳 저곳에는 오늘날의 카페가 즐비하고, 심지어는 홍등가도 존재해, 당시의 남성 중심의 향락 문화가 어땠는지도 알 수 있다. 폼페이를 보면 로마제국 시절 제국 곳곳에  있었던 도시들의 모습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때는 79 8 24일 나폴리 어디에서라도 보이는 베수비오 산이 불을 뿜었다. 드디어 화산이 폭발한 것이다. 처음 베수비오에서 연기가 오를 때는 사람들은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을지 모른다. 종전에도 가끔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그 화산재가 우박처럼 시내로 떨어지자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더러는 몸을 피해 멀리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집안에 머물면서 그 자연현상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된 어느 소년, 저 소년은 저런 모습으로 화산재를 맞이했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떨어지는 화산재의 양은 걷잡을 수가 없다. 사람들의 공포는 점점 더해 이제 많은 사람들이 몸을 피해 이 도시를 탈출한다. 그래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화려한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집에서 가족들과 최후를 맞이한다. 다음 날 화산재는 이 도시를 한꺼번에 먹어 버렸다. 2-3미터 정도로 쌓인 화산재로 말미암아 폼페이는 지구상의 도시목록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와 같은 상황은 그저 추측이나 상상이 아니다. 당시 나폴리의 해군제독이었던 ()플리니우스(이 사람은 아주 박식한 장군이었다. 그는 박물지의 저자이기도 하다)의 조카 ()플리니우스라는 사람에 의해 상세히 기록되었던 것이다. ()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스가 폭발하자 함대를 띄워 이재민을 실어 나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사람도 끝내는 화산재에 의해 운명을 달리했다. 이 와중에서도 조카 ()플리니우스는 살아남아 당시 상황을 상세히 글로 남겼던 것이다.




폼페이 내의 도로 마차가 지나다닌 흔적까지 보인다.


, 이제 폼페이 유적지에 들어가 보자. 내 눈길을 끄는 첫 장면은 폼페이의 포장도로다. 5미터 정도 폭의 도로는 완전히 돌로 포장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로마가도의 원형이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로마인들의 길이다. 폼페이 어딜 가도 이 포장도로는 관광객의 탄성을 자아낸다. 길을 자세히 보면 당시 마차들이 지나간 흔적까지 볼 수 있다. 게다가 마차의 속도를 줄이기 위해 중간중간에 돌로 장애물을 설치했다


참으로 대단하다. 로마인들은 이런 도로를 제국의 이곳 저곳에 수만 킬로미터를 깔아 거대한 제국을 다스렸다. 이 길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중해 전체를 제국으로 만들었을까. 로마제국의 비밀은 바로 이 길에 있음을 실감한다.말이 나왔으니 로마인들이 로마가도를 얼마나 견고하게 만들었는 지 보자. 


가도 중 포장도로를 비아 무니타라 부르는데, 이 길을 만들 때는, 우선 1미터 이상 땅을 판 뒤 주먹만한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작은 크기의 잡석을 넣은 다음, 또 그 위에 석회석 등을 잘게 부순 돌가루를 채우고, 마지막으로 마름모꼴 석판을 깔았다. 석판과 석판 사이가 얼마나 정교했는지 머리카락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한다. 


내 보기엔 로마인들의 이 도로건축술은 현대인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한다. 로마인들의 건축엔 대충이란 단어는 없었다.우리 주변의 도로를 잠시만 돌아보라! 비만 오면 주저 앉는 도로들이 즐비하지 않는가. 도로포장을 대충대충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이 환생해 대한민국을 방문한다면... 상상만 해도 부끄러움에 등줄기에서 땀이 흐른다.


다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도로 이곳 저곳에  설치되어 있는 수도시설이다. 공중우물이라고 생각되는 수도시설은 지금이라도 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쏟아질 것만 같다. 한마디로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 심사가 뒤틀린다. 이 시대가 우리로 보면 삼국시대 초기인데, 이 땅에 살던 우리의 선조는 어떤 모습으로 살았을까. 아무리 국수주의에 빠진들 우리가 저 같은 수도시설을 갖추고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폼페이의 수도


동시대에 지구 이편과 저편이 이처럼 다른 생활을 했다는 것이 정보와 교통의 혁명기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눈으로서는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다. 그뿐인가. 도시 이곳 저곳에 산재해 있는 빵집과 카페 등을 보자. 저 상태에서 조금만 보수하면 당장이라도 사용이 가능할 것 같다. 로마인들이 거리를 지나가며 그날그날 갖구운 빵을 사서, 가게 내에 있는 대리석 테이블 위에서, 빵과 음료를 먹는 모습이 내 눈엔 선하게 보인다


빵가게와 화덕


자연스레 내 발길은 당시의 유곽으로 돌려진다. 내부를 살피니 참으로 흥미롭다. 천정 부근에는 아직도 남녀의 성행위를 담은 춘화 벽화가 선명하다. 인간의 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여러 섹스체위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는데, 로마의 카마수트라라 부를만 하다. 


유곽 내의 침대방들이 보이는데, 이것들이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저 시설들은 한 사회의 존속을 위한 필요악과 같은 것들인가. 인간의 명암이다. 인간이 아무리 도덕을 강조한다고 해도 인간의 본능을 완전히 통제할 순 없다. 본능을 저런 식으로라도 해소하는 것이 사회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게 로마인들의 사고였다. 그들은 인간의 정욕, 그것을 해소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나는 폼페이 유곽에서 로마시대 이후 오늘 날까지 논쟁되는 매매춘 문제를 생각했다. 성매매를 인정할 것인가, 성을 파는 것을 사회가 보호하는 노동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 더 나아가 공창제를 인정할 것인가 등등.... 폼페이 유곽 그림은 내게 인류사의 영원한 논쟁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유곽 내의 벽화, 성행위 장면이 그려져 있다.여자의 가슴이 푸른 브레이지어로 가려져 있다. 이 당시 이미 여자들은 브레이지어를 사용했다!


수많은 저택들, 관광 가이드북에는 그 저택의 이름이 수없이 소개되지만 하나하나 기억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들어가는 저택마다 로마인들의 체취를 느끼기는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저택 앞에서 우연히 바닥에 있는 타일 모자이크를 발견했다. 글자가 쓰여 있는데, 대충 개 조심이라는 뜻이렷다! 2천 년 전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저택에는 개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끔 그 개가 손님을 물었다는 이야기인가. 웃음이 나온다


어느 집 현관 바닥의 타일 모자이크, "개조심"


바닥 타일 모자이크,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 장면


이렇게 폼페이 이곳 저곳을 다니다 보면 고고학자가 따로 없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짧은 시간이나마 누구나 고고학자다. 그저 조용히 도로를 걷고, 건물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면 된다. 그러다 보면  2천 년 전 로마인들이 나타나 내 손목을 끌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 여기저기를 친절히 안내해 줄 지도 모른다.


폼페이 원형극장


열주가 있는 거리


바닥 모자이크와 어린아이 청동상


바닥 모자이크, 중앙의 새 3마리 모자이크


폼페이에서 발견된 각종 기물, 중앙엔 반드시 누워 있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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