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비련의 여인 난주 -소설 <난주>를 읽고-

박찬운 교수 2019. 1. 3. 19:03

비련의 여인 난주
-소설 <난주>를 읽고-



정난주....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 한동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신산한 삶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종교, 신앙, 순교, 사랑, 배신, 연민, 이별, 고통.... 인간이 사는 동안 닥치는 온갖 형태의 희로애락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며칠 전 존경하는 김승환 전북교육감께서 바쁜 공무 중에도 올린 북 리뷰에 감동받고 바로 그 책을 구입했다. 김소연 작가의 제6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작 <난주>. 작년 11월 초판이 인쇄되었으니 출판된 지 불과 2달이 안 된 책이다.

이 소설은 정난주라는 한 여인의 신산하면서도 성스런 삶을 그린 이야기다. 정난주.... 아마 일부 천주교 신자나 알까 대부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이름일 것이다. 정난주 마리아. 그녀는 이제 이 소설로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증언한다.

소설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다.

“1801년 정순왕후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다. 노론벽파를 두둔하던 정순왕후가 남인이 중심이 된 천주교를 탄압하니, 이것이 신유박해다. 남인 명문가의 장녀이자 천주교도인 정난주는 시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하였고, 남편 황사영은 충북 제천의 배론 골짜기에 숨었으나 천주교 부흥을 위한 백서를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려다 발각되어 참형 당했다. 이어 정난주와 시어머니는 각각 제주도와 거제도의 관비로 정배된다.“

정난주, 그녀는 조선 후기 최고 명문가 다산 가문의 맏형 정약현의 장녀다. 

이 집안은 생각하면 할수록 불가사의한 가문이다. 한국 천주교는 이 가문의 절대적인 헌신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희귀한 일이다. 대부분 국가의 기독교 전래는 파송된 신부나 목사의 포교에서 비롯되었지만 조선만은 예외였다. 조선의 천주교는 신부가 오지 않은 상태에서 토착 엘리트들이 서학이란 학문의 이름으로 연구해 그것을 신앙화한 것이다. 이 역사의 중심에 다산 정약용 집안이 있다. 

맏형 약현은 집안을 살리기 위해 천주교를 일부러 배척했지만 그의 형제와 자식들은 이 종교에 목숨을 걸었다. 약현의 동생 약전, 약종, 약용 3형제는 광주 천진암에서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한국 천주교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약현의 매제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고, 처남 이벽은 조선 최초로 천주교회를 창설한 지도자였으며, 외사촌 윤지충은 조상 신주를 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주에서 조선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1791년). 정약종과 그의 맏아들 철상은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했고, 둘째 하상은 기해박해(1939년) 때 순교했다. 정약전과 약용은 신유박해에서 마음을 바꿔 순교를 면했지만 긴 세월 강진과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약현의 사위이자 난주의 남편은 나이 17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황사영. 그는 충북 제천의 배론 골짜기에 숨어 그 유명한 백서사건을 일으켜 발각되어 결국 참수되었다.

난주는 시어머니와 함께 양반에서 관비로 신분이 강등되어, 시어머니는 거제도로, 자신은 두 살배기 아들 경헌을 데리고 제주도로 가게 된다. 그 후 37년의 삶 66 세로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의 내용이다. 한 여인에게 닥친 이 엄청난 풍상을 작가는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역사적 사실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위의 객관적 사실 정도가 전부다. 나머지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최고의 학자 집안에서 곱디 곱게 자라난 여인이 신앙을 간직하며 바람과 돌 그리고 거친 여인네들이 사는 그 각박한 고장에서 겪는 수난, 만남, 이별, 사랑....을 어떤 식으로 그려낼 것인가. 

소설 <난주>를 읽어가면서 첫 번째로 눈망울에 이슬이 맺히는 부분은 아마도 난주가 아들 경헌과 이별하는 장면일 것이다. 난주는 제주로 가는 중 잠시 들른 추자도에 아들을 놓아두고 떠난다. 아들이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하는 간절한 어미의 바람이다. 작가도 어느 인터뷰에서 이 장면이 작가로서 가장 기억 남는 대목이라고 했다.

“경헌아, 눈을 뜨지 않아도 알 것이다. 네가 살아가게 될 땅이다. 죽어서는 아니 된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언젠가는 꼭 만나자꾸나. 그러니 잘 봐두거라. 저 말을, 이 포구를, 그리고..... 어미의 타는 가슴을.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너를 지키는 것이다. 나와 함께 제주로 가게 되면 너는 일평생 천한 노비로 살아갈 뿐 아니라 이 어미의 욕된 꼴을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언제 어느 때 나라님의 변덕으로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 나는 네가 황사영, 정난주의 아들이 아닌 경헌 네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양반도 천출도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의 양민이 되어, 때론 주리고 고통 받겠으나 강인함으로 살아남아 끝끝내 또 다른 생명을 일구어가는 그러한 사내로 말이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거라. 태생에도, 사상에도, 신앙에도.... 너 된 너로 살아남아 어떤 네가 되든.... 천 일 만 일을 하루같이 그리워하고 애태우며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아들아....”(46-47)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리는 난주의 삶은 어쩌면 성녀의 삶이다. 그녀는 제주에서 관비로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도 끊임없는 자기희생과 헌신을 보여준다. 노비의 버려진 딸(보말)을 데려다가 자기 피붙이처럼 키운다. 차귀진의 구휼소를 운영하던 중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교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이 잘려 곶자왈 지네굴에서 갇혀 살 때 만난 기아(연)를 데려다, 아들로 키운다. 천연두가 온 동네를 휩쓸고 갈 때는 의녀로서 활동해 수많은 아이들을 구한다. 별감의 아들 상집과 상윤은 노비인 난주를 평생 어머니처럼 따르고 모신다. 자신을 오랜 세월 괴롭혀 온 아전 하득인도 끝내는 돌아서서 그녀를 존경한다. 저승의 야차 같은 포악한 관헌 조방장 황림도 그녀의 성심과 인격 앞에선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그녀 역시 사람이고 여자다. 나는 작가의 상상력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애절했다. 조선 최고 명문가의 장녀이자 조선 최고의 천재들을 숙부로 모신 자긍심,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남편과 숙부의 순교자적 정신을 이어받은 숭고한 신앙...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났다. 일부종사의 열녀의 길을 떨구어내고 한 여인으로 살고 싶은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이 없었다면 그를 인간이라고 부르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그의 내면의 모습은 이런 장면으로 그려졌다. 난주가 지네굴에서 형벌을 받던 때 자신을 찾아온 정인 정방호와의 해우의 장면이다.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날 데리러 예까지 와주었지. 바닷물을 뒤집어쓰고 발병이 나더라도 오고야 말았을 테지. 난주는 그의 터진 손등에 기름을 발라 보드랍게 만져주고 싶었고, 그의 주린 배를 채워주고 싶었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품에 안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어디 그뿐이랴. 난주에게 넋이 두 개라면 그가 말리더라도 기어코 그를 따라갔으리라. 모든 것을 버리고, 이름도 자식도, 납덩이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와 신앙조차 훌훌 벗어버리고, 아무 이름도 없고 지킬 것도 없는 촌부의 아내로 살았을 것이다. ”내 얼굴이 흉하지요?“ 난주가 눈물을 간신히 그치고 새삼 부끄러운 듯 제 모습을 살폈고, ”그대처럼 고운 여인은 본 적이 없소.“ 정방호는 난주를 위로하듯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 조그만 체구 안에 무슨 짐이 그리도 많은가. 사내는 자신이 채울 수 없는 여인의 삶을 연민하였다. ”내 이름이 싫소“ 난주가 정방호에게 안긴 채로 속삭였다. 난주는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때때로 노여워했고 양반의 가죽을 징그러워했으며 심지어는 산 사람도 아니노라 미워하였지만,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정난주 자신이었다. 난주는 제 욕심과 믿음과 명예의 무게에 진저리를 치고, 또 번번이 이별과 생사의 길을 스스로 택해야 하는 기구한 삶이 서럽고 괴로워서 그쳤던 눈물방울을 다시 흘렸다.”(325)


작가의 노고는 제주 방언을 적절히 구사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유려한 문장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신세대 작가로선 보기 드문 역량이다. 문창과 출신의 소설가답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구성. 내가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서 그런지 한 장에 여러 시대가 왔다 갔다 하는 구성은 머리를 꽤나 아프게 한다. 나 같은 독자는 항상 상상 속에서도 시대를 구별하기 때문에, 대목마다 등장인물의 나이를 추측할 수 없으면 상상 자체가 방해된다. 또 하나는 상상력의 내용. 아버지 정약현과 숙부들 그리고 남편 황사영의 이야기가 조금 더 들어갔으면 좋지 않았을까? 더 상상의 나래를 편다면 난주가 세상을 뜬지 2년 후 난주가 살았던 제주 대정현으로 유배 오는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지 들어갔다면 ....이런 아쉬움은 작가에 대한 무리한 요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