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또 울린 소설
<무국적자>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책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눈물이 쏟아지는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감정선이 무너진 것은 아닌가. 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지만 나오는 것은 또 눈물이다.
구소은의 <검은모래>를 읽으면서 한없이 울었던 내가, 일주일도 안 돼 또 다시, 그의 글을 읽으며 서글피 울었다. <무국적자>. 독서의 여운이 길다. 새벽녘 마지막 장을 넘긴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떠오른다. 그 어느 사람도 이 시대의 영웅은 아니다. 어쩌면 (소설에서 말하듯)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삶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내 마음을 후빈다. 나도 그들처럼 이방인이요, 무국적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줄거리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 직장을 다니며 결혼해 가정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세상엔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 어쩐 이유인지 부모를 부모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람,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생면부지의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 살면서 이 나라 저 나라 국적을 갖지만 당신이 누구냐고 하면, (뭐 나라가 크게 도와준 것도 없는데도) 나는 대한미국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기수에겐 자기를 키워준 부모가 있고,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가 있다. 후자의 부모에겐 이제껏 한 번도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지 못했다. 기수에게 아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기 앞에 나타나 자기를 간호하는 그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다.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 앞에 환자로 나타난 그 젊은이가 자신이 낳은 혈육임을 알았다. 그러나 아들을 부르지 못했다. 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긴 장편소설의 내용을 일일이 정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 보다는 내 기억 속에 각인된 등장인물 몇 명을 호명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말하는 게 낫겠다. 작가가 그린 등장인물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김기수
이 소설의 주인공. 파독 간호사 이숙희와 파독 광부 장동호 사이에서 독일에서 태어나지만 고모인 장신자 내외를 친부모로 알고 자란다. 군대를 다녀와 직장을 다니다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외국으로 피신, 마침내 프랑스 외인부대에 들어간다. 외인부대 작전 중 사고를 당해 장기 입원 중 어머니 이숙희를 만나지만 어머니를 부르지 못하고 귀국한다.
이숙희
김기수의 실제 엄마.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서 일하면서 광부로 온 장동호를 만나 소설의 주인공 김기수를 낳는다. 후일 프랑스 장교를 만나 결혼해 파리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두 자녀를 낳는다. 외인부대 부대원을 간호하던 중 그가 자신의 아들 기수임을 알아채나 끝내 아들을 불러보지 못하고 췌장암으로 죽는다.
장동호
김기수의 실제 아버지. 독일탄광에서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채 한국에 돌아와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낸다. 누나가 키우는 아들 기수를 옆에 두고 살지만 한 번도 아버지임을 밝히지 못한다. 사업에 실패한 다음 고흥으로 내려가 과수원을 해 말년에 자리를 잡는다. 아들 기수가 살인혐의로 쫒기는 신세가 되자 외국으로 빼돌린 다음 전국을 돌며 진범을 잡아 누명을 벗긴다.
장신자
장동호의 누이. 동호의 아들 기수를 친자식으로 여기고 지극정성을 다해 키운다. 그녀는 20여 년간 이숙희와 편지교환을 통해 기수의 근황을 이숙희에게 알린다. 안정된 살림을 해나가던 중 남편 친구의 사기에 넘어가 전 재산을 날린다. 그럼에도 그녀는 끈질긴 생활력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해 가나 뺑소니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마침내 세상을 뜬다.
선주
김기수가 파리에서 만난 여인. 국회의원 딸로 파리에 와서 그림 공부를 하지만 자유분방한 생활로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기수에겐 이국 땅에서 마음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상대. 그가 외인부대를 알게된 것도 그녀를 통해서다. 그녀의 방탕으로 말미암아 결코 둘은 맺어지지 못하지만 기수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머문다.
김준
기수가 외인부대에서 만난 탈북자 출신 동료 부대원. 그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 꽃제비 생활을 했고 남한으로 들어왔으나, 남쪽 생활에 환멸을 느껴 프랑스로 건너가 외인부대에 들어갔다. 말이 없어 친구가 없었지만 유일하게 기수와 단짝이 되어 속마음을 털어놓는 관계가 된다. 그는 책을 많이 읽는 지성적 인물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아는 현실주의자이나 방황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모두 무국적자
이 소설은 기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들 모두와 관련된 이야기다. 작가는 묻는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국적의 소유자냐고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 우리들 중 누구라도 아무 생각없이 ‘나는 대한민국 국민(국적 소유자)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소설에 나오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라. 공감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김준의 말)“지금까지 나는 세 개의 국적을 가져봤어. 북한, 남한 그리고 프랑스. 내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아무도 몰라. 또 다른 국적을 갖게 될지도. 국적이 뭐가 중요해? 나는 그냥 나일 뿐이야. 손에 든 패스포트는 그냥 종이일 뿐이고,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존재 뿐이야. 국적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데 별 상관이 없는 거라고 생각해. 국적은 선택사항이야.”(330)
(김준의 말)“케네디가 그랬지.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물으라고. 웃기는 소리야. 애국을 강제하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아. 애국심은 국민들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야 하는 거라고. 국가가 국민을 위해 믿음을 줘야지. 믿음도 주지 않으면서 강요하는 건 순서가 틀린 거야. 개인의 존엄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 민주주의를 가장한 파쇼와 다를 게 없잖아.”(330)
(김기수의 말)“안식처를 떠나 세상 도처에 있는 사람들. 이런저런 증명서라는 종이 쪼가리로는 결코 보여줄 수도, 보이지도 않는 것, 존재 그 자체가 유일한 증명인 사람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무국적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331)
아무리 모진 사람이라도 이 부분에선 무너지리라
기수는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를 떠난다. 끝내 이숙희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이다. 공항에서 이들 모자는 작별인사를 한다. 그때 어머니는 자기가 직접 뜨개질로 만든 카디건을 선물하고, 기수는 자신이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던 (친부가 고교졸업을 축하하며 준) 만년필과 외인부대에서 받은 훈장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포옹을 한다. 그것이 그들에겐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였다.
이런 사실을 알고 에필로그에서 이숙희가 보낸 편지 중 이 부분을 읽는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모진 사람이라도 무너지리라.
“기수가 나에게 선물한 훈장들을 모두 응접실 벽에 장식해두었고, 네게서 받은 만년필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어. 어떤 인연은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어. 신은 무의미한 장난을 치지 않는단다. 장동호씨는 만년필을 고를 때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야. 그 만년필이 지금 내 손에서 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될 줄은. 나는 소중한 것을 모두 가졌구나.“(에필로그)
“나는 머지않아 떠나겠지. 어쩌면 나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 미련 둘 것이 많지 않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그러면서도 쓸데없이 신에게 농담을 걸어본단다. 저승 갈 때 딱 하나만 가지고 가면 안 될까요? 그렇게 묻고 싶어. 신이 무엇을 가지고 갈 거냐고 물으면, 나는 내 아들이 남겨준 추억을 가져갈 거라고 말하고 싶구나. 공항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나를 안아주던 너의 따스한 온기를 기억하고 있단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마음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에필로그)
매우 정교한 소설
구소은은 전작 <검은모래>에서도 보여주었듯 이 소설에서도 매우 정교한 구성능력을 보여주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정교한 연결, 소설 1부의 이숙희와 장신자 간의 편지교환과 김기수의 성장사를 교차로 보여주는 방식의 서술, 70년대 중반 이후 30년에 걸친 시기의 정확한 시대사,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을 울음바다로 몰아넣겠다는 구상으로 만들어진 복선(만년필, 카디건...)...
이런 서술은 마치 건축가가 정교한 설계도를 만든 다음 시공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구성력을 자세히 살핀다면 작가의 땀과 고뇌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작품을 독자에게 선사한 작가에게 큰 박수를 치고 싶다. 가까운 시일 내에 그의 작품이 독자들에 의해 제대로 평가되길 기대한다. 그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2018.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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