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나를 또 울린 소설 <무국적자>

박찬운 교수 2018. 12. 30. 11:24

나를 또 울린 소설

<무국적자>



이 생각해 본다나는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인가그렇지 않고서야 책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눈물이 쏟아지는가나이를 먹어가면서 나의 감정선이 무너진 것은 아닌가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보지만 나오는 것은 또 눈물이다.


구소은의 <검은모래>를 읽으면서 한없이 울었던 내가일주일도 안 돼 또 다시그의 글을 읽으며 서글피 울었다<무국적자>독서의 여운이 길다새벽녘 마지막 장을 넘긴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이 떠오른다그 어느 사람도 이 시대의 영웅은 아니다어쩌면 (소설에서 말하듯)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이다그런 사람들의 삶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내 마음을 후빈다나도 그들처럼 이방인이요무국적자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줄거리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정상적인 교육을 받고직장을 다니며 결혼해 가정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그러나 세상엔 그렇지 못한 사람도 많다어쩐 이유인지 부모를 부모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람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생면부지의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살면서 이 나라 저 나라 국적을 갖지만 당신이 누구냐고 하면, (뭐 나라가 크게 도와준 것도 없는데도) 나는 대한미국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이 소설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기수에겐 자기를 키워준 부모가 있고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가 있다후자의 부모에겐 이제껏 한 번도 아버지 어머니를 불러보지 못했다기수에게 아주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자기 앞에 나타나 자기를 간호하는 그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았다그러나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했다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자신 앞에 환자로 나타난 그 젊은이가 자신이 낳은 혈육임을 알았다그러나 아들을 부르지 못했다이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긴 장편소설의 내용을 일일이 정리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그 보다는 내 기억 속에 각인된 등장인물 몇 명을 호명해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말하는 게 낫겠다작가가 그린 등장인물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김기수

이 소설의 주인공파독 간호사 이숙희와 파독 광부 장동호 사이에서 독일에서 태어나지만 고모인 장신자 내외를 친부모로 알고 자란다군대를 다녀와 직장을 다니다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외국으로 피신마침내 프랑스 외인부대에 들어간다외인부대 작전 중 사고를 당해 장기 입원 중 어머니 이숙희를 만나지만 어머니를 부르지 못하고 귀국한다.


이숙희

김기수의 실제 엄마파독 간호사로 독일에서 일하면서 광부로 온 장동호를 만나 소설의 주인공 김기수를 낳는다후일 프랑스 장교를 만나 결혼해 파리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두 자녀를 낳는다외인부대 부대원을 간호하던 중 그가 자신의 아들 기수임을 알아채나 끝내 아들을 불러보지 못하고 췌장암으로 죽는다.


장동호

김기수의 실제 아버지독일탄광에서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채 한국에 돌아와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낸다누나가 키우는 아들 기수를 옆에 두고 살지만 한 번도 아버지임을 밝히지 못한다사업에 실패한 다음 고흥으로 내려가 과수원을 해 말년에 자리를 잡는다아들 기수가 살인혐의로 쫒기는 신세가 되자 외국으로 빼돌린 다음 전국을 돌며 진범을 잡아 누명을 벗긴다.


장신자

장동호의 누이동호의 아들 기수를 친자식으로 여기고 지극정성을 다해 키운다그녀는 20여 년간 이숙희와 편지교환을 통해 기수의 근황을 이숙희에게 알린다안정된 살림을 해나가던 중 남편 친구의 사기에 넘어가 전 재산을 날린다그럼에도 그녀는 끈질긴 생활력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생활해 가나 뺑소니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고 마침내 세상을 뜬다.


선주

김기수가 파리에서 만난 여인국회의원 딸로 파리에 와서 그림 공부를 하지만 자유분방한 생활로 시간을 보낸다그래도 기수에겐 이국 땅에서 마음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상대그가 외인부대를 알게된 것도 그녀를 통해서다그녀의 방탕으로 말미암아 결코 둘은 맺어지지 못하지만 기수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머문다.


김준

기수가 외인부대에서 만난 탈북자 출신 동료 부대원그는 어린 시절 중국에서 꽃제비 생활을 했고 남한으로 들어왔으나, 남쪽 생활에 환멸을 느껴 프랑스로 건너가 외인부대에 들어갔다말이 없어 친구가 없었지만 유일하게 기수와 단짝이 되어 속마음을 털어놓는 관계가 된다그는 책을 많이 읽는 지성적 인물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아는 현실주의자이나 방황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모두 무국적자

이 소설은 기수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들 모두와 관련된 이야기다. 작가는 묻는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국적의 소유자냐고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고우리들 중 누구라도 아무 생각없이 나는 대한민국 국민(국적 소유자)이다라고 말한다면이 소설에 나오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라공감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김준의 말)“지금까지 나는 세 개의 국적을 가져봤어북한남한 그리고 프랑스내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변수가 생길지 아무도 몰라또 다른 국적을 갖게 될지도국적이 뭐가 중요해나는 그냥 나일 뿐이야손에 든 패스포트는 그냥 종이일 뿐이고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존재 뿐이야국적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해주는 데 별 상관이 없는 거라고 생각해국적은 선택사항이야.”(330)


(김준의 말)“케네디가 그랬지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먼저 물으라고웃기는 소리야애국을 강제하겠다는 말에 지나지 않아애국심은 국민들 가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야 하는 거라고국가가 국민을 위해 믿음을 줘야지믿음도 주지 않으면서 강요하는 건 순서가 틀린 거야개인의 존엄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 민주주의를 가장한 파쇼와 다를 게 없잖아.”(330)


(김기수의 말)“안식처를 떠나 세상 도처에 있는 사람들이런저런 증명서라는 종이 쪼가리로는 결코 보여줄 수도보이지도 않는 것존재 그 자체가 유일한 증명인 사람들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무국적자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331)

 

아무리 모진 사람이라도 이 부분에선 무너지리라

기수는 자기를 키워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를 떠난다끝내 이숙희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이다공항에서 이들 모자는 작별인사를 한다그때 어머니는 자기가 직접 뜨개질로 만든 카디건을 선물하고기수는 자신이 보물처럼 가지고 다니던 (친부가 고교졸업을 축하하며 준만년필과 외인부대에서 받은 훈장을 선물한다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포옹을 한다그것이 그들에겐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였다


이런 사실을 알고 에필로그에서 이숙희가 보낸 편지 중 이 부분을 읽는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아무리 모진 사람이라도 무너지리라.


기수가 나에게 선물한 훈장들을 모두 응접실 벽에 장식해두었고네게서 받은 만년필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어어떤 인연은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어신은 무의미한 장난을 치지 않는단다장동호씨는 만년필을 고를 때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야그 만년필이 지금 내 손에서 내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될 줄은나는 소중한 것을 모두 가졌구나.“(에필로그)


나는 머지않아 떠나겠지어쩌면 나에게 내일이라는 시간이 없을지도 몰라미련 둘 것이 많지 않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그러면서도 쓸데없이 신에게 농담을 걸어본단다저승 갈 때 딱 하나만 가지고 가면 안 될까요그렇게 묻고 싶어신이 무엇을 가지고 갈 거냐고 물으면나는 내 아들이 남겨준 추억을 가져갈 거라고 말하고 싶구나공항에서 내 손을 잡아주고 나를 안아주던 너의 따스한 온기를 기억하고 있단다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마음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에필로그)


매우 정교한 소설

구소은은 전작 <검은모래>에서도 보여주었듯 이 소설에서도 매우 정교한 구성능력을 보여주었다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정교한 연결소설 1부의 이숙희와 장신자 간의 편지교환과 김기수의 성장사를 교차로 보여주는 방식의 서술, 70년대 중반 이후 30년에 걸친 시기의 정확한 시대사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을 울음바다로 몰아넣겠다는 구상으로 만들어진 복선(만년필카디건...)... 


이런 서술은 마치 건축가가 정교한 설계도를 만든 다음 시공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구성력을 자세히 살핀다면 작가의 땀과 고뇌가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훌륭한 작품을 독자에게 선사한 작가에게 큰 박수를 치고 싶다가까운 시일 내에 그의 작품이 독자들에 의해 제대로 평가되길 기대한다. 그날이 곧 올 것이라 믿는다.(2018.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