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LUND 의 추억

사진으로 추억하는 룬드(5)(나의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 시절)

박찬운 교수 2015. 12. 23. 14:49

-5- 사진으로 추억하는 룬드

 

나의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 시절

-재벌의 사회적 기여와 평등에 대한 단상-

 


룬드대학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


나는 왜 스웨덴에 갔는가? 대한민국 법대교수로서는 처음으로 연구년을 그곳에서 보내기로 한 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도 한몫했겠지만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가 어떤 곳인지 직접 경험하고 싶었던 게 더 큰 이유였다. 과연 북구 복지국가는 우리가 가야할 미래가 될 수 있을까? 

2012년 여름부터 1년간 나는 스웨덴 룬드대학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나는 이미 약속된 연구주제에 대한 연구활동을 하면서 틈만 나면 스웨덴에 대한 내 평소 의문을 풀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이 연구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먼저 연구소 이름에 붙어 있는 라울 발렌베리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자2012년 스웨덴 정부 홈페이지에는 1년 내내 한 인물사진이 포스팅되어 있었다. 누구였을까? 바로 라울 발렌베리라는 인물이다. 그것만 보아도 이 사람은 분명 스웨덴에서 특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사람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한 발렌베리 가문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이 가문은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전설과 같은 존재로 스웨덴 현대사는 이 가문을 빼고 말할 수 없다. 150여 년 전 금융업에서 시작해 오늘날까지 스웨덴 경제 전체를 휘어잡고 있는 불세출의 가문이다. 지금도 스웨덴 GDP30%, 스웨덴 주식시장의 시가 총액 40%에 해당하는 돈을 이 가문이 움직인다.

 

오스카 발렌베리(1816-1886), 해군 장교출신으로 오늘 날 발렌베리 재벌을 만든 장본인이다. 


사회민주주의 국가에 웬 공룡재벌이 있다는 말인가. 그 답이 바로 스웨덴 패러독스ㅡ복지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국가 경쟁력을 높이긴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스웨덴은 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나라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스웨덴 패러독스라 한다ㅡ에서 찾아야 한다. 공룡재벌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국민의 평등에 기여하는 나라가 스웨덴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두 가지로 유명하다하나는 부의 철저한 사회환원이다. 이를 위한 것이 공익법인 발렌베리 재단인데, 이것은 발렌베리 가문이 소유하는 모든 기업의 이윤이 최종적으로 도착하는 종착역이다. 이 재단은 공익기부를 통해 사회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협조하는 역할을 무려 100년간 지속해 왔다. 매년 대학과 연구기관 등에 기부하는 기부금 총액이 지난 5년간만 무려 8500억 원에 달한다.

사실 100년 전 스웨덴이 러시아와 같이 혁명을 거치지 않고 복지국가의 길을 갈 수 있었던 비밀은 재벌과 노동자와의 대타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스웨덴도 빈부격차가 컸고 노동자의 불만은 컸다. 그냥 놓아두면 피의 혁명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둘은 대화를 했고 드디어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냈다. 그게 바로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스웨덴 모델이었다.

두 번째 발렌베리 가문을 유명케 한 것은 사회적 처신이다. ‘존재하되 드러내지 않는다.’ 이 말은 웬만한 스웨덴 인이라면 다 아는 발렌베리 가문의 좌우명이다. 따라서 이 가문은 기업소유와 관련하여 사회적 룰을 위반하거나 탈세를 해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적이 없다.


라울 발렌베리(1912-1947)

 

이쯤해서 오늘의 주인공이 나올 차례다. 라울은 발렌베리 가문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인물이다. 그는 세계 2차 대전 중 헝가리 주재 외교관으로 있으면서 가스실로 끌려가는 수만 명의 유태인들의 생명을 구했다. 이름하여 그는 스웨덴 판 쉰들러다. 그는 중립국인 스웨덴의 지위를 이용하여 당시 생사의 기로에 선 유태인들에게 가짜 여권과 비자를 대량으로 발급해 줘 그들을 안전지대로 빼돌렸다. 그리고 그는 전쟁 종료와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라울 발렌베리는 지난 반 세기 동안 스웨덴을 넘어 서구 사회에서 인권과 평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세계 곳곳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거한다. 여기에 더해 룬드대학은 1984년 그를 기념하는 연구소,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지난 30년 동안 인권연구와 인권교육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음으로써 라울의 뜻을 기렸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있는 라울 발렌베리 동상

 

발렌베리 인권연구소는 내가 보는 상당수의 국제인권관련 전문서적을 지난 20여 년 간 발간함으로써 인권연구자들의 연구를 도왔다. 이와 함께 이 연구소가 힘을 기울이는 것은 인권개발도상국에서의 인권교육이다. 스웨덴 정부의 해외공적원조기금을 지원받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현지 사무소를 두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6곳에 발렌베리 인권연구소 지역 사무소가 있는데, 아시아 지역으론 베이징, 자카르타, 양곤에 그것이 있다. 베이징대학의 국제인권법 석사과정 프로그램도 발렌베리 인권연구소의 지원 아래 운영되는 것이다.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 도서에서 필자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의 피카 타임


나는 이 연구소에 있는 동안 스웨덴의 인권기구, 그 중에서도 옴부즈만 제도에 대해 연구했다. 알다시피 옴부즈만 제도는 스웨덴에서 시작해 세계 각국으로 퍼져 나간 것이다. 나는 이곳 연구소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검토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연구소 직원 중 이 분야 전문가를 찾아가 인터뷰했다. 옴부즈만 사무소 본부가 룬드에서 600킬로미터나 떨어진 스톡홀름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 담당자와의 인터뷰를 위해서는 장거리 출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연구결과는 룬드에 있는 동안 원고지 200매 분량의 연구논문으로 만들어져 <법조>란 저널에 게재되었다.

 

2013년 5월 노르딕 국가 인권전문가 워크샵, 룬드대학 현대미술관에서 2박 3일간 열렸다.

노르딕 국가 인권전문가 워크샵 참석자를 위한 만찬, 룬드대학 법대 피카룸에서 열렸다.


기억에 남는 것은 20135월 말에 있었던 노르딕 국가(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인권전문가 워크샵이었다. 23일 동안 이들 국가에서 온 전문가와 노르딕 국가 인권기구 활동에 대해 전반적인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워크샵이었다. 나는 이 워크샵의 준비위원으로 참여해 준비단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연구소 직원들과 함께 일했다. 이 과정을 통해 스웨덴 친구들의 일하는 방법을 눈 여겨 보았는데, 나로선 느낀 바가 많았다.

우선, 우리와는 달리 준비를 매우 간소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여러 나라 전문가를 불러 회의를 한다면 준비절차가 대단히 복잡하다. (그런 이유로 국제행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들의 준비는 우리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평상시 식사에 손님 몇 사람 불러 밥상에 숫가락 몇 개 더 올려놓는다는 기분으로 준비한다고나 할까. 준비하는 직원도 단 2명에 불과했다. 경비? 우리와 비교하면 1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이었으리라.

우리나라 관공서의 국제회의 준비에 들어가는 예산은 스웨덴 사람들이 보면 놀라 자빠질 정도이다. 항공료, 호텔경비, 만찬경비, 행사당일 경비, 관광안내 비용 등등... 요즘엔 많은 관공서가 이런 행사를 직접 하기가 귀찮으니 아예 행사기획업체에 돈을 주고 맡긴다. 보통 한 번에 최하 수천, 많게는 수억 원이 들어간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닌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될 허례허식이다. 

둘째, 워크샵은 철저히 토론중심이었다. 우리의 워크샵이나 토론회는 토론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형식에 치중한다. 누가 와서 기조연설할 것인가, 어떻게 자료집 만들 것인가, 어떻게 홍보 할 것인가, 관중 동원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것 준비하는 데에 시간과 에너지를 다 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노르딕 국가 인권전문가 워크샵 참석자들과 함께


발표를 위해 참석자에게 돌리는 페이퍼도 고작 1-2쪽의 요약 발표문이 전부이고, 참석자들에게 부과된 요구사항도 많지 않았다. 그저 토론장에서 성의있게 토론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워크샵은 룬드대학 내의 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되었는데, 미술관 내에서 4-5개 팀으로 나누어져 토론을 벌리다가 수시로 전체 모임을 갖고 토론결과를 발표한 뒤 참석자 전체와 자유롭게 토론했다. 모든 토론은 영어로 진행되었지만 회의 진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우리가 나가야 할 바람직한 토론문화를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형식을 반으로 줄이는 대신 토론 자체를 내실화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토론회가 소통과 합의의 장으로서 기능할 것이라 본다.



2012년 크리스마스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 파티


내가 라울 발렌베리 연구소에서 있으면서 나를 부끄럽게 한 것이 스웨덴 사람들의 평등의식이었다. 내가 아무리 인권연구가라 할지라도 내 의식은 여전히 고루한 한국 법률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 보자. 2012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었다. 이 때가 되면 스웨덴의 어느 직장이든 공식 파티가 열린다. 이 비용은 공식예산으로 지출되는 데 우리 연구소도 하루 날을 잡아 학교 내의 유서깊은 방을 하나 빌려 케이터링 서비스로 파티를 열었다.

내가 파티장에 도착하니 입구에서 안내하는 직원이 내게 카드 반쪽을 주었다. 이게 무엇인가?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좌석마다 카드 반장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남은 반쪽 카드를 찾아가 앉으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앉다보니 내 자리가 자 테이블의 안쪽 중앙이었다. 한국에서라면 상석 중의 상석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연구소의 최연장자인 석좌교수와 서열 1위 연구소 소장은 방 입구 근처에 앉고 말았다. 우리 같으면 신참자 들이나 앉을 말석인데... 그렇지만 그들은 자리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 날 나를 더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내 앞에 앉은 두 분의 중년 부인이었다. 앉아서 인사를 하니 어디서 본 사람들이다. 이분들은! 그렇다. 아침이면 내 방과 복도, 화장실을 청소하는 연구소 청소부 아주머니 두분이었다. 이 분들이 정장을 하고 내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 온 박 아무개란 교수의 얼굴이 어떻게 되었을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날 밤 늦게 집에 돌아와 일기를 썼다. 한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내 앞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여자. 그들은 우리 연구소의 청소부들이다. 청소부가 세 사람인데 모두가 초대되어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청소부들이 연구소의 소장을 비롯하여 교수, 연구원 등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정담을 나눈다. 나는 참으로 충격을 받았다. 바로 이것이 스웨덴이다. 평등사회의 진수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어느 누구에서도 권위주의의 모습은 없다. 청소부든, 무엇이든, 하는 일이 다를 뿐이다. 이런 세상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세상이 아닌가."

바로 이것이 평등국가 스웨덴의 한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