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LUND 의 추억

사진으로 추억하는 룬드7(룬드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하다)

박찬운 교수 2015. 12. 27. 20:29

-7- 사진으로 추억하는 룬드

 

룬드의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하다

 


룬드 중앙광장

유럽의 도시를 갈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도시마다 있는 광장이다. 고색창연한 역사도시에는 예외 없이 도심에 광장이 있고, 성당과 시청 그리고 조그만 가게들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광장에서 두 개의 권력, 즉 교권과 속권이 만나고 이를 경제력이 떠받치는 모습이다.

따지고 보면 서구 사회의 광장은 중세나 르네상스기에 비롯된 것이 아니고 멀리 그리스의 아고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니 광장은 2000년 이상 서구인들의 삶의 공간이었고, 서구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도시인들에게 있어 광장은 삶의 중심이다. 이들은 매일같이 광장에 모여들어 성당에서 기도하고, 시청에서 볼 일을 보았다. 집에 돌아갈 때는 광장에 있는 가게 집에서 쇼핑을 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이곳이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 공화국의 중심이다. 이곳에서 피렌체의 중요 정치행사가 이루어졌다.


시에나 캄포광장, 광장의 제왕이라 불린다. 시에나는 한 때 피렌체와 경쟁한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도시다. 캄포 광장은 시청을 중심으로 경사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뿐 만인가. 광장은 정치의 장이었다. 연설가들은 이곳에서 시민들을 향해 자신의 정견을 발표했고, 시민들은 이에 환호했다. 시민들은 이 광장에서 지배자의 폭정을 고발하고 때론 총과 칼을 들고 시청을 향했다. 서구민주주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예외 없이 광장을 거치지 않은 민주주의는 없었다. 그곳은 민주주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었다.

역사도시 룬드도 이러한 모습에서 예외가 아니다. 비록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지만 유럽의 전형적인 도시모습, 그 중에서도 광장문화는 이곳에 아직도 확연히 남아 있다.

이 소도시에 들어가면 도시 정 가운데에 룬드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 옆엔 성당광장이 있다. 평상시 이곳은 만남의 장소이다. 룬드성당이 도시의 랜드마크니 사람들이 시내에서 만날 때는 자연스레 이곳을 약속장소로 정한다.



룬드성당 광장에서 필자가 유학생들에게 성당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성당 앞길을 따라 남쪽으로 백여 미터만 내려가면 중앙광장 스토르토리예트가 나타난다. 이 광장엔 과거 룬드시청(공회당)이었던 건물이 아직도 건재하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은 대부분 상가건물이다.

이곳 광장은 사시사철 문화의 공간이다. 연말이 되면 맨 먼저 이곳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설치된다. 연중 몇 차례 축제가 열릴 때면 이곳은 그 모든 행사의 중심이다. 추운 겨울을 빼고는 거리의 악사들이 이곳에서 연주를 한다.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연주자의 연주와 노래에 박수를 보내면서 따뜻한 햇빛을 즐긴다. 때가 되면 주변 레스토랑의 노변 좌석은 하나 둘 차기 시작하고 상가의 출입구는 사람들로 붐빈다.


 

룬드 중앙광장


룬드 중앙광장의 겨울, 크리스마스 트리가 광장 한쪽에서 겨울을 난다.


룬드 중앙광장에서 학생들이 공연을 하고 있다.


중앙광장 뒤쪽으론 또 하나의 넓은 광장 모텐스토리가 있다. 이 광장은 아주 옛날부터 플리마켓으로 사용되어 왔다. 매일 아침 룬드 주변의 농가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와 과일이 이곳으로 실려와 점심 무렵까지 장이 열린다. 광장 주변의 대형 수퍼마켓에도 채소와 과일이 산처럼 쌓여있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사람들은 농장주들이 직접 자신의 트럭에 싣고 온 싱싱한 식료품을 믿고 산다. 나도 이틀에 한 번 꼴로 이곳에서 장을 보았다.


모텐스토리 광장, 매일 아침 장이 선다.


모텐스토리 광장, 봄이 되니 이렇게 화초가게가 문을 열었다.


룬드 주말 시장, 토요일이면 룬드 남쪽 도로변엔 중고물건을 가지고 나온 시민들로 가득찬다. 시장의 길이가 5백미터에 가깝다.


현재 유럽 도시 곳곳에 있는 광장은 과거 선조의 유산이다. 지금 이 광장에서 과거와 같은 광장의 기능이, 더욱 민주주의의 기능이 작동한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광장은 서구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DNA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어딜 가도 토론을 즐기는 것은 바로 이런 DNA가 아직도 그들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서울에서 살면서 주말이면 꼭 동네 산책을 한다. 아쉬운 것은 어딜 가도 광장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골목길을 헤맨 다음 아담한 광장을 만나 거기 벤치에서 잠시 쉬면서 호떡 한 개 사서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겐 광장이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함께 모이고, 토론하는 문화를 갖지 못했다.

 

성남 모란시장

그나마 시골 5일장이 유사한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이것마저 없었다면 유관순의 3·1만세운동은 불가능했으리라. 하지만 그것이 민주주의 공론장으로 연결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민주주의는 그저 모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항시 상대를 인정하면서 토론하고, 설득해야 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대한민국에 이제 새로운 광장이 탄생했다. 인터넷과 SNS가 그것이다. 이 분야만큼은 우리가 단연 세계 최고라 해도 좋다. 이것은 서구의 어떤 광장과도 비교가 안 되는 소통수단이다.

이제 다사다난했던 을미년 2014년이 가고 새로운 변화가 예상되는 병신년 2015년이 온다. 2015년은 우리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한 해로 기록될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과 같은 숨막히는 정치질서가 연장될 것인가, 아니면 그 고리를 끊고 변화의 길로 들어설 것인가. 이런 갈림길에서 인터넷과 SNS가 그 역사를 좌지우지할지 모른다.

이 수단을 우리가 현명하게 활용한다면 새로운 민주혁명이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과학기술에 왜곡된 또 다른 우민정치가 시작될 것이다. 그 선택은 우리 민주시민의 지혜와 역량에 달려 있다.(2015.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