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LUND 의 추억

사진으로 추억하는 룬드4(커피 한 잔 하실까요?)

박찬운 교수 2015. 12. 18. 21:49

-4-사진으로 추억하는 룬드


커피 한 잔 하실까요?(Ska vi fika?) 



   

스톡홀름 옴부즈만 사무소. 사무소 중앙에 피카룸이 있고 직원들 방은 피카룸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서구사회는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개인은 소외되기 쉽다? 반면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 문화가 강해 개인은 항상 사회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된다? 정말 그럴까? 내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 이 생각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북구 복지국가인 스웨덴에서 1년간 생활하면서 이런 생각을 말끔히 정리했다. 서구사회라 해서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복지국가에서는 그 성패가 구성원의 공동체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법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문화의 문제였다. 사회적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복지국가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연대는 다른 것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말로 하는 것이다.

스웨덴 사람들은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곳은 우리와 같은 밤문화가 거의 없다. 대신 그들은 밤에 집으로 손님을 초대한다.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 꽃을 피운다. 한 시간 두 시간 아니 밤을 새워 이야기한다. 나하고 같이 생활했던 젊은 친구들도 그랬다. 나도 이야기라면 한국 사람치고는 한 가락하는 사람이지만 이들에겐 게임이 안 되었다. 밤이 늦으면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피했지만 내 하우스메이트들은 종종 밤을 새우곤 했다.


스웨덴 어느 교수가 나와 친구 몇을 집으로 초대했다. 비교적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늦은 밤까지 이야기 꽃을 피웠다. 나이 차가 30년이 되지만 학생들과의 관계가 마치 친구사이같다.


강의실에 들어가도 우리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요즘 한국엔 거의 모든 교수들이 강의할 때 PPT를 이용하는 데, 룬드대학에선 그런 교수가 많지 않았다. 주야장창 말을 할 뿐이다. 판서도 잘 않는다. 제기랄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있나?  ㅎㅎ. 교수의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 질문이 이어지는데, 이 친구들 대단하다. 교수가 완전히 친구나 다름없다. 막힘없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교수도 그것을 경청한다.

내가 있던 연구소 회의에서도 그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소장이 참석하는 회의에 여러 번 들어가 보았지만 상하관계의 일방적 지시는 한 번도 없었다. 이들은 대화를 통해 완벽한 합의를 추구한다. 이견이 있으면 절차는 늦어지지만 일단 합의가 되면 그 권위는 놀라울 정도로 높다. 이 모든 게 토론을 즐기는 스웨덴 문화의 소산이다. 그럼 이런 토론문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오늘 그 한 가지 단면만 소개해 보자.


룬드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그들의 FIKA 문화이다. FIKA는 스웨덴어로 ‘커피’라는 뜻의 명사이기도 하지만 ‘커피를 마시다’라는 동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웨덴 사람들 사이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은 영어의 Shall we have a cup of coffee? 에 해당하는 Ska vi fika?이다. 어딜가나 피카, 피카다. 수퍼마켓에 가면 피카용 커피가 산처럼 쌓여 있다. 세계에서 1인당 커피 소비량이 제일 많은 나라가 스웨덴이란 게 실감이 간다.



스톡홀름의 남스톡홀름 대학 정치학부 교수 피카 룸


스웨덴의 모든 직장에는 피카룸이라는 것이 있다. 피카룸은 통상 모든 구성원이 가장 만나기 쉬운 곳에 위치한다. 사무직들이 근무하는 일반 직장의 피카룸은 통상 오피스 중앙에 위치한다. 

내가 근무한 연구소 건물은 오래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내부구조 자체가 폐쇄형이라 번듯한 피카룸은 없었지만 그래도 방 중에서 가장 큰 방을 피카룸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대학 교수들이 있는 곳은 어떨까? 그곳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대학엘 가도 구조는 비슷하였다. 피카룸이 교수 연구실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 그게 스웨덴 대학의 교수연구실의 구조다. 아무리 싫어하는 교수라도 하루에 한 두 번은 보지 않을 수 없는 곳, 그곳이 스웨덴 대학의 연구실 풍경이다. 

피카는 직장마다 조금은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오전 피카와 오후 피카, 하루에 두 번을 한다. 내가 있었던 라울발렌베리 연구소의 경우를 설명해 보자. 연구소 직원들은 출근한 후 바쁜 일을 마치고 오전 10시경 하나 둘 피카룸에 모인다. 피카룸에는 커피를 내리는 기계와 냉장고가 있고 간단한 주방시설이 붙어 있다. 

먼저 온 사람이 커피를 내리는 것이 관례! 그리고 주방은 당번을 정해 관리한다. 피카룸에 모여 이야기하는 것은 다양하다. 업무 이야기도 하지만 보통은 부담스런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겨울이면 날씨가 우중충하니, 햇빛이 보이는 날이면 제일 많이 듣는 게 날씨 이야기다. 어딜 가도 역시 아이들 이야기는 단골 메뉴다. 먼 여행을 다녀 왔으면 여행지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 놓는 것도 예외일 수는 없다. 물론 내가 끼면 당연히 한국 이야기다, 한국의 스마트폰 최고 운운... 




내가 있었던 룬드대학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의 피카 장면, 연구소는 2주에 한 번씩 피카룸에서 오전피카를 하면서 공식조회를 한다.


아주 공적으로도 이 피카가 이용된다. 우리 연구소는 2주에 한번 아침 조회가 피카 시간에 열렸다. 진행은 각 국에서 돌아가면서 주관하는 데(각 국에서 빵과 과일 등을 미리 준비해 간단하게 조찬을 제공한다), 소장이 먼저 연구소 전체상황과 현안을 설명한 다음 각국별로 현안을 보고한다. 그런 다음 전체적으로 협력을 구할 사항을 이야기한다. 분위기? 아주 화기애애하다. 커피, 빵, 과일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데 분위기가 딱딱할 리가 없다. 공식적인 모임이면서도 분위기는 비공식적이다. 

나는 이런 피카를 스웨덴 곳곳에서 발견하였고, 사진을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이것이 스웨덴을 지탱하는 문화라는 확신을 갖고.... 

스웨덴이 유독 이런 문화를 갖게 된 이유를 생각하면 역시 위에서 말한 대로 그 나라가 세계 제일의 복지국가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복지국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얼음같은 개인주의를 녹여주는 따뜻한 집단문화가 필요하다. 공동체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이 전제되지 않고서야 내가 버는 돈의 절반을 세금으로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피카는 바로 이런 의식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룬드대학 법과대학의 교수 피카 장면, 피카룸은 교수 연구실 바로 앞에 위치한다. 교수들은 점심식사도 보통 이 피카룸에서 간단히 도시락으로 한다.


나는 학교에 있는 사람이다. 대학이라는 곳은 어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개인주의가 강한 곳일지도 모른다. 옆방 교수도 맘만 먹으면 1년에 한 번도 안보고 살 수 있는 게 한국의 대학문화다. 나처럼 오랜 기간 사회생활을 하고 대학으로 옮긴 사람들에겐 이런 문화를 처음 대했을 때 충격 자체였다. 

학교 밖에서 사회생활을 하면 혼자서 점심을 먹는 일은 드문데 학교에서는 흔치 않는 일이다. 교수들이 모여서 서로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구하는 일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그런데 스웨덴에서는 그렇지 않다. 교수들은 매일같이 피카룸에 모여 커피를 마시면서 동료교수들과 담소를 나눈다. 이런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교수들의 협업은 자연스럽다. 많은 수업이 한 학기 내내 한 교수에 의해 전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여러 교수들이 참여하는 팀티칭으로 이루어지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나는 꿈을 꾼다! 

내가 언젠가 학교 경영을 맡는다면(ㅎㅎ 나는 학교 보직에 전혀 관심이 없다), 내가 어느 기업체의 사장이라면(ㅎㅎ 가끔 그런 생각이 있다. 큰 돈을 벌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다), 나는 이 피카문화를 맨 먼저 도입할 것이다. 오피스를 만들 때는 피카룸을 꼭 설계에 넣도록 할 것이다. 

(말이 나왔으나 한 마디 하면 피카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건축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피카 문화를 만들기 대단히 어렵다. 피카에 친한 건축!) 

사무실의 중심에 피카룸을 만들어 직원들 모두가 쉽게 올 수 있게 하고 나부터 하루에 꼭 한 번은 피카룸을 들를 것이다.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직원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것이다. 직원 모두가 우리 직장이 분위기 좋은 곳, 모이는 게 즐거운 곳, 그래서 일하고 싶은 곳이라고 생각하도록 해 줄 것이다. 아마도 그런 분위기라면 직장 내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런 꿈이 한국에선 이루어질 순 없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그런 꿈을 꾸고 싶다. 나의 꿈은 사람이 사람답게 대우받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런 꿈이 이루어질 때, 공동체에 대한 긍지가 생길 것이고, 이런 꿈이 이루어질 때, 병영의 가혹행위, 학교의 왕따 문화는 자취를 감출 것이기에 결코 버릴 수 없는 꿈이다.

(2015. 1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