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종교 철학 심리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박찬운 교수 2024. 2. 21. 07:41

 

잠시 삶과 죽음을 생각해 본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새벽까지 책 한 권을 읽었다. 200쪽이 안 되는 소책자이지만 내게 주는 울림이 크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신아연 지음).

어제 저녁 서가의 책을 정리하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낯선 책이다. 내가 이런 책을 샀는가? 약간의 호기심에 겉표지를 넘기니 명함 한 장이 나왔다. 신아연. 모르는 이름이다. 생각을 더듬으니 작년 어느 토론회에 가서 받은 책과 명함이다. 나는 그날 조력사망에 관한 세미나 좌장으로 나갔다가 토론회가 끝난 뒤 청중 한 사람으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바로 그분이 이 책의 저자였다. 그날 나는 건성으로 인사를 받고 책을 받아 집으로 가지고 와 1년 동안 모셔 두다가 어제서야 우연히 읽게 된 것이다. 저자에게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조력 자살을 하는 사람의 부탁을 받고 스위스에 가서 그 사람의 마지막을 함께 했던 기록이다. 망인은 죽기 전 가장 아끼는 지인 몇 사람과 저자를 생을 마감하는 현장에 초대했다. 망인은 그들을 스위스 바젤의 어느 호텔로 초대해 며칠을 같이 보내면서 생과 죽음을 이야기하다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생을 마쳤다. 일행 모두 일생일대 충격적인 경험을 한 것이다.

작가는 4박 5일간의 상황을 생생하고도 마음 저미게 묘사한다. 책장 넘길 때마다 내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내가 마치 망인의 옆에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행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책장을 닫고 허공에 이런 질문을 했다.

생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의 시작은 나의 의지와 관계 없지만 죽음의 순간은 내 의지로 선택 가능한 것인가? 인간의 영혼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단지 물질이고 죽음으로 없어지는 존재인가?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양심과 윤리는 무엇일까? 죽음 이후는 그저 먼지에 불과하다면 양심이고 윤리이고 다 허망한 것이 아닌가? 죽음 앞에선 용감하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그런 상황이라면 어떤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죽음의 시간을 선택해 어느 시점에서 생을 끝내는 것도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죽을 수 있다면 몰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죽는 것은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다. 이것은 마치 사형수가 스스로 집행을 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사형은 집행에서 오는 고통보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는데 조력 사망도 비슷하다. 죽음의 시간까지 주변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는 것은 죽는 자와 지켜보는 자 모두를 고통과 공포로 이끈다. 자연스럽게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과 죽음을 선택한 사람을 지켜보는 것은 차원을 달리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너무 사는 것에 급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자세로 살아왔지만 내가 정작 삶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닥칠 미래는 죽음이고, 이 죽음 앞에선 누구라도 진실할 수밖에 없는데, 내 진실함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저 하루하루 목표 없이 살아가다가 잠시의 진실함도 체험하지 못하고 갑자기 사라지지나 않을지 두렵다.

오늘 모처럼 기차를 타고 남쪽 지방으로 향하는 데 기차 안에서 눈을 감고 생각해 봐야겠다. 내게 있어 삶과 죽음은 무엇인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찾아올 때 나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지 아니면 죽음은 나의 영역이 아니니 끝까지 버티며 신의 처분에 맡길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