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기타

이념을 넘어 3차 산업혁명을 논하자

박찬운 교수 2015. 9. 28. 05:27


[경향논단]이념을 넘어 3차 산업혁명을 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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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 현실을 살피면 보수와 진보논쟁을 빼놓을 수 없다. 모든 정치인은 이 두 개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속박하고, 언론마저도 그 잣대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1980년대에 생긴 NL과 PD 논쟁은 아직도 진행되며, 이번 통합진보당 비례경선 사태에서 비롯된 진통도 그 궁극적 뿌리를 이들 이념논쟁과 연관지어 보는 시각도 있다. 세상이 변했음에도 진보진영이 여전히 철지난 사상과 이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물론 보수진영이 실망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종북 운운하며 개XX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다양하다. 시장, 복지, 경제성장, 환경, 남북문제, 대외관계 등에서 두 진영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진보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들 정권이 진보의 가치를 모두 실현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진보의 정체성이 모호한 것에서도 연유했지만, 보수의 반작용이 컸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보수가 정권을 잡았다 해도 다르지 않다. 그 동네도 때론 보수의 정체성이 모호하고, 진보의 강한 반작용에 주춤거릴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니 보수와 진보가 항상 정치적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문명사적 입장에서 볼 때 보수와 진보는 1, 2차 산업혁명에 따른 이데올로기의 후예들이다. 산업혁명은 인간이 욕구하는 물질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고, 자유로운 시장을 요구했다. 또한 그것은 자본의 대외적 팽창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는 옹호파와 반대파로 나누어졌는데, 전자는 보수로, 후자는 진보로 발현되었다. 과학과 기술은 사회발전에서 하부구조인 물질적 토대를 형성하며 그것은 상부구조인 법과 제도를 결정한다는 논리는 카를 마르크스만의 주장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 문명사의 객관적 관찰에서 나온 보편이론이다. 하부구조는 상부구조에 선행하지만 그 관계는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발전한다. 과학기술이 법과 제도를 추동하지만, 법과 제도 또한 과학기술을 추동시킨다. 그렇게 보면 산업혁명 후의 세상의 변화는 단순히 과학기술에 의해 나타난 필연적인 사회현상이 아니라 과학기술을 추동하는 정치적 작용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여기서 정치지도자들의 비전이 작용한다. 자동차는 과학기술자가 만들었지만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놓은 것은 정치인들의 몫이었다. 만일 정치인들이 도로망을 만들지 않았다면 역사는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문명 흐름을 목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 내한한 제러미 리프킨은 최근작을 통해 ‘3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이야기한다. 이제 화석연료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재생가능에너지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며, 그것은 인터넷과 융합하여 새로운 산업체제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 체제에서는 수억명의 사람들이 집과 사무실에서 스스로 녹색에너지를 생산하고, 인터넷 안에서 서로 공유하는 세상을 만들어간다. 거기에서 수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지며,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수평적인 관계가 된다. 그 흐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이 같은 예측은 한 미래학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EU는 이미 3차 산업혁명에 입각한 장기적인 경제비전과 로드맵을 공인하였다. 세계가 이 방향으로 나가는 것은 과학기술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3차 산업혁명이 제대로 이 땅에서 꽃 피우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종사하는 전문가의 역할이 크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세분화된 과학기술을 결합시켜 그것을 3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 흐름으로 엮어 낼 수 있는 사람은 과학자도, 기술자도 아닌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인의 몫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1, 2차 산업혁명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보수, 진보 논쟁을 하루빨리 3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논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다가오는 대선에서 재생에너지와 인터넷을 융합한 3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면서 미래를 이야기할 후보자가 과연 누구일까, 자못 궁금해진다.(경향/2012.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