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인문명화산책

인문명화산책(7)피테르 브뢰헬, 쾌락과 절제의 싸움을 그리다

박찬운 교수 2015. 9. 26. 22:15

인문명화산책(7)

[피테르 브뢰헬, 쾌락과 절제의 싸움을 그리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브라질에 갈 것이다. 거기에 가서 리우 카니발에 참가하고 싶다. ...거리를 꽉 매운 인파 속에 들어가 격렬하게 엉덩이를 놀리는 삼바 춤의 무희들과 한 바탕을 춤을 춘다. 그리고 먹고 마시면서 며칠을 딴 세상에서 살아본다. ... 한 순간의 쾌락이지만 그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그것이 나의 꿈틀거리는 육체적 본능이다.



피테르 브뤼헬, ‘사육제와 사순절 사이의 싸움’, 1559

내가 이런 꿈을 꾸는 것은 우리의 삶이 너무 팍팍하기 때문이다. 1년 열 두 달 뭐 하나 즐거운 때가 없다. 개인적으로야 간간히 그런 일이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겐 사회 전체가 즐기는 문화행사가 없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떠나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순간은 모든 것을 잊고 놀아보는 그런 때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가난에 절고, 권위에 숨 막히는 생활을 하면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것으로만 살 수 없다. 우리도 놀아보아야 한다. 신나게 우리의 본능을 만끽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게 나만의 공상인가?


그러나 그런 공상이 현실화된다고 해도 그 육체적 쾌락을 지속할 수 없는 게 우리 인생사다. 육체적 쾌락의 지속은 정신을 파괴한다. 쾌락만을 위한 삶은 인간을 물질에 다름없는 존재로 타락시킨다. 그렇기에 인간에겐 절제가 필요하다. 그 절제가 쾌락을 조절할 것이니, 그것은 정신의 산물이다.


사회적 삶을 생각하면 질서와 절제의 덕목은 더욱 필요하다. 그것이 없이는 사회가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인간은 종교를 만들었고, 그 종교는 질서와 절제를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세뇌시킨다. 그것이 종교의 최소한의 사회적 기능이다. 그래서 종교는 권력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며, 또 한편으론 운명적으로 절제를 추구한다.’ 이런 결론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피테르 브뢰헬, 이 사람은 16세기 북구 르네상스의 한 가운데에서 이 문제를 정확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것을 한 장의 그림으로 완성했다. 제목도 멋지다! <사육제와 사순절 사이의 싸움>(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 (1559년).


제목만 보면 매우 종교적이다. 그림 내용도 어떻게 보면 그렇다. 하지만 이 그림을 너무 그렇게 종교적으로만 보지 말자. 위에서 이야기한대로 쾌락과 절제라는 인간의 영원한 갈등을 한 장의 그림 속에 표현한 것으로 보자. 그러면 이 그림은 매우 쉬운 그림이다.


기독교 문화에서 사육제, 곧 카니발(Carnival)이라는 것은 고난의 기간인 사순절을 맞이하기 전 인간 본능에 맞춰 여한 없이 즐기기 위한 행사였다. 영어의 Carnival의 어원은 고기라는 뜻의 carni와 금지 혹은 안녕이란 뜻의 val의 합성어다. 그러니 그 뜻은 고기여 안녕!이란 뜻이다. 금욕의 사순절을 맞이하여 마음껏 고기를 먹고 놀자는 것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이제 한 동안 이 맛있는 고기는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순절(Lent)이라는 것은 원래 예수의 40일간의 광야의 기도를 기리는 것이다. 예수는 이 기간을 마치고 본격적인 공생애에 들어선다. 3년간 기적을 행한 다음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빌라도의 재판을 받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을 받고 죽는다. 예수는 40일간 사막에서 고독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면서 하느님에게 기도를 드렸다. 쓰디쓴 죽음의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것이 예수의 운명이었다. 사람들은 절제와 금욕을 경험하면서 예수의 이 시련과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크게 둘로 나누어져 있다. 왼쪽 건물은 세속을 상징하는 여관이고, 오른쪽 건물은 영적 세계를 상징하는 교회다. 사람들은 왼쪽 여관 앞에선 사육제를 즐기고 있고, 오른쪽 교회 앞에선 사순절을 기리고 있다. 왼쪽은 쾌락의 인간들이 나오며, 오른쪽은 절제와 금욕 속에서 신음하는 인간들이 나온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몇 장면만 설명해 보자. 그림 중앙 왼쪽에는 배불뚝이 남자가 술통 위에 앉아서 창과 같은 쇠꼬챙이를 들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 꼬챙이에는 돼지 머리가 꿰어져 있다. 이 사람은 푸줏간 주인이다. 사육제에선 이런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 기간 중에 이들은 고깃간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귀한 고기를 대접해야 한다.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이는 칼을 들고 따르고, 또 어떤 이는 빵이 차려진 상을 머리에 이고 따르기도 한다. 기타 모양의 악기를 연주하는 이의 배를 보니 많이도 먹은 모양이다. 빵빵하다.


그림 중앙 오른쪽엔 배불뚝이 푸줏간 주인과 일합을 겨루는 두건을 쓴 앙상한 여인이 보인다. 그녀는 생선 두 마리를 올려놓은 긴 나무 주걱을 들고 있다. 그 뒤에는 배고픈 군상들의 행렬이다. 그들 손엔 뭔가가 들려 있다. 빵 한 조각 정도의 적은 예물이지만 사순절을 준비하는 적은 정성의 손길이리라. 그 위 행렬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앞에서 늘어서서 부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한 신사가 동전 한 잎을 그들이 내미는 바구니 속에 넣어 주고 있다. 선행의 현장이다.


이런 사육제와 사순절의 싸움 속에서도 무관한 이들이 있다. 그림의 중앙 우물 윗부분을 보라. 아이들이 놀고 있다. 팽이를 돌리면서 노는 아이들 모습이 정겹다. 쾌락과 절제의 싸움은 어른들의 일이다. 아이들은 하루를 놀면 그것으로 끝이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그저 하루하루 살면 그뿐이다.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