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인생/인문명화산책

인문명화산책(9)죽어가는 왕비도, 황제의 대관식도 그린 변절자 루이 다비드

박찬운 교수 2015. 9. 26. 21:06

인문명화산책(9)

[죽어가는 왕비도, 황제의 대관식도 그린 변절자 루이 다비드]


학기 중이라 시간이 걸리는 글을 쓰지 못했다. 일요일 잠시 시간을 내 연재하던 명화 이야기를 이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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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다짐을 한다. 양심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 진보적인 사람이 되어서 사회, 국가, 세상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맹세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생각은 퇴색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급기야 전혀 딴판의 인간이 되고 만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생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조 있는 인물을 구한다. 나는 비록 배신자가 된다고 해도 우리를 이끄는 바로 그 사람만은 신념을 갖고 살길 바란다. 그 사람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혹독하게 그를 변절자라고 비판한다. 삶의 여정에서 유혹과 고통을 견뎌내고 소신을 지킨 지식인, 우리는 그런 사람을 존경한다.


예술사에서 위대한 예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끔 역사의 배신자로 지탄을 받는 이들이 있다. 미술가 중에서 가장 대표적 인물이 바로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라는 사람이다. 18-19세기 신고전주의 유파의 대표적 화가로 미술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아마 독자들 중에는 그의 그림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알프스를 넘어가는 나폴레옹>.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이 그림 하나만으로도 그는 후세인들에게 나폴레옹을 불세출의 영웅으로 각인시켰다.


<나폴레옹 대관식>(1808)


그뿐인가. 오늘 보는 <나폴레옹 대관식>을 보라. 이 그림은 다비드가 황제 나폴레옹의 위대함을 천재적인 필치로 그려낸 정치화의 표본이다. 그는 1804년 나폴레옹이 국민투표로 황제가 된 다음 대관식 하는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이 그림은 단순한 황제 대관식이 아니다. 나폴레옹의 권위, 그것도 교권(교황)에 대한 황제의 우월적 권위를 교묘하게 보여 준 희대의 정치화이다. 그림을 보면 이 대관식은 노트르담 성당에서 교황(비오 7세)의 집전 하에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교황은 그저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그림은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면서도 황후 조세핀이 나폴레옹으로부터 왕관을 받는 장면을 그렸다. 이것이 왜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일까.


나폴레옹은 교권을 통해 황제의 정당성은 확보하고 싶었지만 교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다. 천하제일은 자신이지 교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날 대관식에서 교황이 가지고 있는 월계관을 빼앗아 스스로 머리 위에 쓰고 말았다.


다비드는 이런 대관식 장면을 그림에 있어 그날 있지도 않았던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으로 바꾸어버렸다. 나폴레옹이 교황으로부터 월계관을 빼앗아 스스로 쓰는 장면을 그린다면 그것은 당장 교황청과의 대결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부담되는 장면이다. 교황청과의 대립을 모면하면서 나폴레옹의 권위를 한껏 보여줄 수 있는 장면으로 택한 게 바로 이것이다. 그림도 잘 그렸지만, 당시의 유럽의 정세를 예리하게 파악하면서, 나폴레옹에게 봉사하는 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일품이다.


하지만 다비드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의 주체세력의 일원이 되어 혁명의 이념을 그린 예술가였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으며 자코뱅 당원으로 루이 16세의 사형선고에 앞장섰다. 혁명의 동지였던 마라가 암살되자 <마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을 그려 민중과 슬픔을 같이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자코뱅 당원으로서 그가 그린 역사적 작품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저승길로 가는 날 그녀를 그린 크로키(<기요틴으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다. 오늘 보는 두 번째 그림이다. 1793년 10월 16일 앙투아네트가 콩코르드 광장에서 기요틴에 의해 목이 잘려 나가기 직전 마차로 호송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그가 이것을 그린 것은 혁명의 전위로서 왕과 왕비를 죽이는 역사적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고자 함이었다.


그러던 그가 나폴레옹이 등장하자 혁명을 져버렸다. 아니 그것을 넘어 이제는 황제의 충복이 되었다. 한마디로 변절자이자 비열한 인간이었다.


이런 그에 대해서 20세기 최고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의 대표작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통렬히 비판한다. 나는 오늘 아침 지난 5일간 틈나는 대로 읽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다비드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조금 길지만 우리 모두가 한번쯤 음미해 볼만한 대목이라 생각하여 그대로 옮겨본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 게시하는 두 그림을 보기 바란다. 아마도 감상이 달라질 것이다.


<기요틴으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1793)


『생오노레 가 한 모퉁이, 요즘 카페 드 라 레장스가 있는 곳에 한 남자가 손에 연필을 들고, 종이를 든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가 바로 가장 비열한 인물이며, 또한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였던 루이 다비드였다.


그는 혁명 동안에는 권력을 쥔 사람들 밑에서 일을 했으나 그들이 위험에 처하자 그들을 저버렸다. 임종 시의 마라를 그렸고, 테르미도르 제8일에는 로베스피에르에게 비장한 말투로 “함께 마지막까지 잔을 비우겠다”고 맹세를 해 놓고는, 제9일에는 숙명적인 국민공회가 개최되자 영웅적인 갈증이 사라져버린 비참한 이 영웅은 몰래 집에 숨어서 참으로 비겁하게 그러나 멋있게 기요틴을 피했다.


혁명 중에는 폭군의 적대자였던 그는 새 독재자가 나타나자 제일 먼저 방향을 돌려 나폴레옹 대관식을 그리고 지난날의 귀족에 대한 증오를 대던지고 “남작” 칭호를 받기에 이르렀다. 권력에 대한 영원한 변절자의 전형으로 승자에게 아부하고 패자에게는 무자비했던 그는 승자의 대관식을 그렸고, 패자가 형장으로 가는 마지막 길을 그렸다.


오늘 마리 앙투아네트가 타고 가는 죄수 호송마차를 나중에 탄 당통은 이미 그의 교활함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못된 종놈 근성 같으니”라고 경멸의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종의 근성과 비겁함이 천성이기는 했지만, 뛰어난 눈과 정확한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단숨에 종이에다 형장으로 가는 왕비의 모습을 그렸는데 놀랄 만큼 뛰어난 스케치였다.“』(526-527쪽)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찬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