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레 미제라블 완역본(5권)을 완독하고

박찬운 교수 2015. 9. 26. 17:54

[레 미제라블 완역본(5권)을 완독하고... 몇 가지 단상]


2015년 4월 4일 낮 12시 50분. 나는 드디어 <레 미제라블> 제5권을 독파했다. 빨리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다섯 권을 읽는데 3주가 걸렸다. 일과시간을 제외하고 내가 확보할 수 있는 대부분 시간(새벽 2시간, 지하철 출퇴근 왕복 1시간, 귀가 후 1시간)을 이 책 읽기에 투자했음에도 총 2,500쪽(민음사)의 이 소설은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두어 시간 산책을 했다. 머릿속은 온통 장발장, 코제트, 마리우스, 자베르 등 소설 속 등장인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돌아 와 잠시 생각을 정리할 때다. 방대한 분량의 책을 읽었다는 것 때문만이 아니다. 이 소설은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책이다. 지금 이것을 짧게라도 정리해 놓지 않으면, 이 책에 대한 예의도 아니며, 시간이 흐른 다음 후회할지도 모른다.


레 미제라블을 다 읽었다? 그것으로 성실을 보증한다.
누군가 완역본 레 미제라블을 다 읽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의 성실성과 끈기를 믿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세계에서 가장 알려진 책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은 극히 적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이제 그 이유를 명백히 알았다. 특히 번역서를 읽어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 어려움은 더하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전 5권 중에는 아무리 읽어도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장도 있다. 그런 책을, 중간에 집어던지지 않고 끝까지 다 읽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박수를 받을만 하다. 더 나아가 누군가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까지 느꼈다면 그는 폭 넓은 지식의 소유자이면서, 동시에 종교와 철학에 대해 깊이 사유하는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이 들어 이 책을 읽어라.
나는 이 책을 젊은 사람들에겐 당장 권하고 싶지 않다. 대신 장년 이후에 이 책을 읽을 것을 조언하고 싶다. 레 미제라블이라는 위대한 소설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한 권짜리 축약본을 읽으면 족하다. 나도 아주 어린 시절 그것을 읽었고, 그 이야기만으로도 일정한 감동을 받았다.



젊은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고뇌를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들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쫓기는 몸임에도 불구하고, 정성을 다해 키운 코제트와의 관계에서 장발장이 느낀 그 고뇌를, 젊은이들이 어찌 쉽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 책은 나이 든 사람들에게 맞다. 빅토르 위고도 이 책을 장년이 되어 쓰지 않았는가. 망명생활을 하면서 17년간에 걸쳐 쓴 것이니 인생의 단맛, 쓴맛이 이 책 곳곳에 스며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 것을 제대로 이해하며 이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삶의 경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이 무엇인지,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자유가 무엇인지, 양심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하느님이 실재하는 것인지 등등에 대해 생각해 보길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정말 진지하게 읽어보길 권한다. 밑줄을 쳐라! 어떤 부분은 되새김질을 하면서 읽어라!


역사를 이해하고 이 책을 읽어라
이 책은 쉽지 않은 책이다. 장발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발장은 시대의 산물이었다. 프랑스 혁명(1789년), 왕정의 폐지와 공화국의 탄생, 나폴레옹의 출현(1796년), 워털루 전투와 나폴레옹의 퇴장(1815년), 왕정복구와 루이 18세와(1815년)와 샤를 10세의 등장(1824년), 7월 혁명과 루이 필립의 등장(1830년), 6월 폭동(1832년), 2월 혁명과 루이 나폴레옹의 등장(1848년) 등등...


들라클라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 1832년. 이 그림의 배경은 1830년 7월 혁명으로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기도 하다.


왕정과 공화국 그리고 황제정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프랑스의 숨 막히는 근대사를 이해하지 않고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깜깜한 밤중에 길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프랑스 근대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야 한다.


내 경우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동안 서양사를 공부해 온 덕을 톡톡히 보았다. 만일 내게 그런 지식이 없었다면 이 방대한 책을 읽었다고 해서 무엇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을까?


장발장은 누구인가?
장발장! 그는 누구인가. 나는 이 책을 여기에서 요약하진 않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빅토르 위고가 그리고자 한 장발장은 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장발장은 위고가 그린 또 다른 예수였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를 버렸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남에게 주었다. 생명까지도 말이다.


그는 도망자였음에도 온갖 선행을 베풀었다. 그는 무고한 이가 자기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제발로 중죄인 법정을 찾아 가 그 사람은 죄가 없음을 증언했고, 스스로 감옥을 선택했다. 그는 가엽게 죽어간 팡틴이라는 창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탈옥을 했고, 그녀의 딸 코제트를 구했으며, 사랑으로 그녀를 키웠다. 자기를 끊임없이 추적하며 목숨을 위협한 형사 자베르를 용서했고, 코제트가 사랑한 남자 마리우스를 사지에서 구해 칠흑 같은 파리의 하수도를 헤맸다.


그리고... 그는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두 남녀의 결혼 지참금으로 내놓았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행복한 노후가 보장되었음에도 그는 마리우스에게 자신이 도망자였음을 밝히면서 양심의 존엄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끝까지 자기의 선행을 밝히지 않았고,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는 부부로부터 조용히 떠나 삶을 정리하고 눈을 감았다. 이렇게 살 수 있는 자가 누구일까? 그것은 예수밖에는 없다. 작가는 장발장을 등장시켜 한 인간이 예수로 성화(聖化)되어 가는 과정을 그렸던 것이다.


그의 새로운 삶을 지탱해 준 것은 미리엘 신부의 사랑이었다. 그가 준 두 개의 은촛대는 그 상징이었다. 죽음의 순간까지 그 은촛대는 그의 머리맡을 지켰다. 장발장에겐 하느님이 알파요, 오메가였던 것이다.


너무나 어려운 번역소설? 
150년 전의 프랑스 소설을 우리가 완벽하게 우리 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마 어떤 번역가도 그런 일을 하긴 벅찬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번역한 정기수 선생에게 큰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사진은 그 중 한 대목


하지만 이런 박수에도 불구하고 독자로선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책 곳곳에 독해가 불가능한 수렁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 부분 예를 들자.(사진 참고) 4권 7장 ‘곁말’이라는 부분은 그 제목부터 독해가 불가했다. 이 장은 사실 번역을 포기한 장이나 마찬가지다. 번역자가 적절한 번역이 어려웠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방법으로라도 독자들에게 원작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생각건대, 만일 이 책이 좀 더 알기 쉽게 번역되었다면(1권과 5권은 그런대로 괜찮다!), 방대한 분량의 소설이라도 더 많은 독자가 생겼을 것이고, 더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레 미제라블, 소설의 완성도가 떨어지는가?
독자들 사이에서는 레 미제라블이 소설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의미 있는 평가다. 왜냐 하면 이 책을 현대적 소설기법으로 썼다면 두 권, 1천 쪽 안팎으로 집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데에는 나름 이유도 있었다. 내가 빅토르 위고를 위해 조금 변호해주고자 한다.


이 책이 이렇게 방대해진 이유는 위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았다는 것과 그의 주체할 수 없는 박학다식이었다. 그는 17년 동안 이 책을 쓰는 데 힘을 들였다. 그렇다보니 스토리 전개는 느리기만 했고, 독자들에겐 너무 지루할 정도로, 등장인물 중 중요한 사람이나 중요사건들을 무한정 세밀히 묘사했다.


미리엘 신부, 워털루 전투, 픽퓌스 수녀원, 파리의 하수도 등등... 그는 이런 것이 나올 때면 무려 100쪽씩 설명하고 묘사했다(예컨대, 장발장이 죽어가는 마리우스를 업고 파리 하수도를 헤매는 장면을 묘사할 때 수십쪽 분량으로 파리 하수도의 역사를 설명한다). 읽는 사람은 꼭지가 돌 일이다. 아마도 그런 태도는 오늘날 의 소설적 기법으로 보면 용납이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프랑스 혁명 이후 근 4-50년의 프랑스 역사를 손바닥 보듯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만하면 위고의 그 현학적 자세를 사면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 가지 더. 레 미제라블이 출간된 후 18년 후(1880년)에 나온 도스토예브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읽다보면 그것도 무언가 이것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도스토예브스키도 곳곳에서 삼천포로 빠지면서 독자들의 머리를 돌게끔 한다. 그럼에도 그 작품은 불후의 명작이 아닌가. 아마도 19세기 유럽 장편소설의 특징이 이런 게 아닐까 한다.


언젠가 파리에 가면...
내가 언젠가 파리에 가면 반드시 가 볼 곳이 있다. 파리 팡테옹이다. 그곳에 가서 빅토르 위고를 만나, 그에게 당신의 책을 완독했음을 알리고, 잠시 추모해야겠다. 그게 이 위대한 작품, 불멸의 작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