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 13

내 인생 최초의 미식열전 ― 1983년의 추억

내 인생 최초의 미식열전 ― 1983년의 추억 내 나이 곧 예순 중반에 들어선다. 나이가 들수록 이상하게도 오늘보다 어제가 더 또렷해진다. 며칠 전, 차를 몰아 서울 외곽의 만두국 전문점을 찾았다. 이른 시각 갔지만 장안에서 내노라한다는 소문답게 이미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만둣국도 맛이 있었지만 함께 나온 빈대떡도 기대이상이었다. 행복한 식사를 하고 옆 카페로 옮겨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살아오면서 내가 진심으로 “맛있다!” 탄성을 질러본 음식은 언제, 무엇이었을까.기억은 자연스레 1983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 인생 최초의 미식의 순간은, 사실 첫사랑과 겹쳐 있다. 대학 3학년이던 그해, 집사람을 만나 명동을 드나들었다. 한참 고시 준비 중이던 시절이라 만나도 ..

늙어가는 것에 대하여

늙어가는 것에 대하여 늙는다는 게 우울한 일일까. 우리는 너무 쉽게 그렇게 말한다. 젊음이 떠나면 남는 것은 쇠락과 상실뿐이라고, 밤이 길어질수록 인생도 어둡게 기운다고 말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젊은 시절에는 결코 누리지 못하는 것들이 늙음 속에 분명히 있다.이 생각은 오래전 키케로가 쓴 책에서 이미 발견된다. 그는 『노년에 대하여』에서 네 가지 이유로 통념을 비판하며 오히려 노년을 예찬했다. 노년은 활동을 빼앗고, 육체를 약하게 만들며, 쾌락을 줄이고, 죽음에 가깝게 만든다? 그는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활동은 달라질 뿐 사라지지 않고, 육체는 약해져도 정신은 더 깊어지며, 쾌락이 줄어드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욕망에서 벗어나는 해방이고, 죽음에 다가간다는 사실은 오히려 삶을 더..

나의 법정론 -법정의 권위가 무너지면 무엇이 남는가-

나의 법정론 -법정의 권위가 무너지면 무엇이 남는가-지귀연 판사가 맡은 내란재판을 둘러싸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공개된 영상을 보면 그의 재판 진행은 기이하다 못해 기본적 법정 질서마저 흔들리는 수준이다. 피고인과 변호인은 법정을 사적 공간처럼 사용하며 장난스러운 언행을 이어가고, 재판장은 이를 제지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모습이다. 신속하고 엄정한 판단을 기대하는 국민으로선 답답함을 넘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나는 법정의 권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본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하는 재판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렇기에 절차적 정당성과 공적 권위가 재판의 신뢰를 지탱하는 핵심이다. 권위를 상실한 법정에서는 판결이 설득력을 잃고, 사법 판단은 곧바로 승복하기 어려운 결정으로 전락한다.영국의 법정 ..

나의 인물론

나의 인물론 나는 인간을 바라볼 때 언제나 두 측면을 함께 본다. 거친 본능과 냉철한 이성. 이 두 요소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사람에게 나는 깊은 매력을 느낀다.나는 본능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는 얼굴과 몸짓에서는 거칠고 생생한 생명의 힘이 느껴지지만, 말 한마디와 눈빛 속에는 어딘가 모를 이성의 흔적, 배움과 사유가 깊게 배여 있는 사람이다. 그는 다듬어진 조각상처럼 완벽하고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생명력이 넘치는 원초적 아름다움을 품은 사람이다.얼굴에 나타난 슬픔과 기쁨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슬픔 뒤에도 그는 낭만과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기쁨 뒤에도 그는 남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여린 마음의 소유자..

권리를 위한 투쟁 — 자유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ㅡ

권리를 위한 투쟁 — 자유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ㅡ 나의 교양과목 ‘자유란 무엇인가’ 수업이 종강을 앞두고 있다. 학기 말이 되면 나는 늘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다시 읽는다. 한 학기 동안 배운 자유의 개념을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학생들과 함께 성찰하기 위해서다.우리는 흔히 인간의 자유가 헌법과 법률에 규정되면 보장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법전에 적혀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유가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권리의 주체가 스스로 그것을 지키고 향유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실천력을 갖추지 못하면, 법에 적힌 권리는 종이 위의 권리일 뿐이다.자유가 실현되는 과정은 결국 개인의 능력과 태도에 좌우된다. 이를 세세히 들여다보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첫째, 현재의 상황이 자유 침..

복종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복종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 들어가며복종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의 기반이자, 때로는 인간을 억압하는 가장 깊은 사슬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권위에 복종하며 살아간다. 부모, 교사, 상사, 국가, 신, 혹은 더 추상적인 사회규범까지. 복종은 단순히 ‘강요된 행위’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자발적이며, 때때로 쾌감을 동반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복종하는가? 복종은 억압인가, 욕망인가, 혹은 생존의 전략인가?이 질문을 중심으로 본 에세이는 에리히 프롬, 미셸 푸코, 스탠리 밀그램, 사도-마조키즘(SM)을 연결하여, 복종의 심리를 다면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2. 에리히 프롬: 자유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 – 복종은 심리적 도피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

한미 관세 합의, 국회 비준 동의를 받으라고?

한미 관세 합의, 국회 비준 동의를 받으라고? -한마디로 무모하고 미련한 짓이다-야당의 국정 발목잡기가 도를 넘었다. 국힘은 정부가 어렵게 합의한 한미 관세 합의 결과를 놓고도 그 노고를 치하하긴커녕 ‘백지시트’라고 공격하며 국회 비준 동의를 받으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런 주장은 국제법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한, 대한민국의 국익을 손상시키는 무모한 정치적 공격이다. 그 이유를 몇 개의 Q&A로 설명한다.Q1. 이번 한·미 관세 합의에는 우리 정부의 현금투자 등 재정적 부담이 있다. 그렇다면 국회 동의가 필요한 조약 아닌가?A1. 아니다. 헌법상 핵심 기준은 ‘재정 부담의 존재’가 아니라 ‘그 부담을 국제법적으로 구속하는가’이다. 우리 정부가 지출을 계획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지출이 국제법상 의무..

1983년, 극락사의 겨울

1983년, 극락사의 겨울(티브이에서 어떤 작은 암자의 가을 풍경을 보았다. 순간 그 암자가 내가 젊은 시절 공부한 한 사찰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나는 42년 전 겨울로 돌아가 추억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나이 스물 두 살 1983년 겨울, 나는 경기도 광주 오포면 양벌리 백마산 자락에 있는 극락사에서 세 달간 고시공부를 했다. 그 시절의 오포는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선 지금과 달리,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절까진 걸어서 40~50분 정도의 산길이 이어져 있었다. 가로등도 없어서 밤이면 길 전체가 어둠 속에 묻혔다. 마을 사람들은 “밤엔 귀신이 다닌다”고 말했고,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던 시절이었다.극락사는 스님 한 분과 보살 한 분이 지키는 작은 절이었다. 고시생들..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 (나는 우리 사회 일반의 기준으로 볼 때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이다. 변호사, 박사, 교수이니 이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도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 글은 이에 대한 단상이다.)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작은 나라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 K컬처는 국경을 넘고, 반도체는 글로벌 기술의 심장이 되었으며, 조선 산업은 세계 시장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이 작은 땅에서 이런 성취가 쏟아져 나오는 걸 보면, 한국인으로서 가슴 뿜뿜 자부심이 솟는다. 대한민국은 한때 영광을 누렸던 네덜란드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그야말로 리틀 자이언트다.그러나 그 자부심의 이면에는 다른 현실이 있다. 입시는 청소..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

대한민국을 위한 기도 하늘이여—오늘도 나는이 나라의 이름을 천천히 불러 봅니다. 먼 도시의 불빛 아래서한국이라는 소리가 퍼져 나갈 때,작은 땅에서 피어난 큰 울림이내 마음 깊은 곳을 흔듭니다. 노래 하나가 먼 나라의 밤을 밝히고,드라마 한 장면이 낯선 사람의 눈시울을 적시며,작은 무대에서 태어난 리듬이지구 반대편의 광장까지 번지는 나라. 모래알 같은 칩에 세계의 속도를 담아내고,거대한 배를 바다 위의 성채로 세우며,미래의 에너지를 설계하는 손길이 살아 있는 나라. K컬처의 숨결과기술의 맥박이 함께 뛰는 이 나라의 이름이세상 어딜 지나도내 걸음을 더욱 굳세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늘이여—문을 닫아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늘한 기운의 그늘이발끝에 내려앉습니다. 말은 빠르고,분노는 가까우며,책임은 멀어집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