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가슴 뭉클... 현대판 서부영화, <그란토리노>

박찬운 교수 2020. 8. 10. 22:03

 

 

 

 

 

 

어린 시절 가끔 미국 서부영화를 보았다. 존 웨인, 게리 쿠퍼,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이 주연한 서부영화는 소년의 가슴에 미국에 대한 동경을 가져다주었다. 법은 멀고 주먹이 앞서는 현실에서, 총을 쏘며 악당을 물리치는 서부의 총잡이들의 모습은, 내 머릿속에 알게 모르게 미국적 정의를 각인시켰다. 정의는 저렇게 실현해야 하는 것인데...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번이라도 저렇게 화끈하게 정의가 불의를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언젠가부터 미국적 정의란 ‘힘의 정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힘이 없는 사람에겐, 힘이 없는 나라에선, 정의를 바랄 수가 없다는 게, 미국 서부영화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 아니었던가. 미국적 정의란 생각할수록 서글픈 것...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서부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뻔한 이야기, 결국 미국 자랑하는 영화인데, 거기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존 웨인도, 게리 쿠퍼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더 이상 내 머리에 남지 않았다.

 

 

<그란 토리노>를 만들고 있는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년 생)가 언제부터인가 영화를 직접 만드는 감독이 되고, 급기야는 자기 영화에 스스로 주연으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서부영화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그다지 보고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감독도 모른 채 화제작 몇 편을 보고 나서(최근 영화론 이미 리뷰를 쓴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작품임), 이 사람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는 미국적 정의를 그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분명 진화한 서부극을 만들고 있었고, 거기에다 새로운 감동까지 주고 있었다. 그 감동의 관객 중에 내가 포함된 것이다.

 

 

월트의 삶은 외롭다

 

 

서론이 길었다. 오늘 서부영화의 대명사 클린트 이스트우드 옹이 만들고, 자신이 직접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한편을 소개한다. 2009년 개봉되어 전 세계적으로 거의 3억불의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 <그란토리노>. 가슴 뭉클한 영화다. 누구든지(?) 이 영화를 보고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다시 평가할 것이다. 역시 명불허전! 80 노인(올해 나이 90세)이 저런 영화를 만들고 주연을 맡다니 믿기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볼 사람들을 위해 디테일한 스토리는 삼가는 것이 좋겠다. 다만 이 글은 나의 기억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 간단하게라도 스토리와 감상을 정리해 두고자 한다.

 

 

월트는 현대판 총잡이다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고, 오랜 세월 포드 자동차에서 일하다가 은퇴한 꼬장꼬장한 노인. 한국 전쟁의 깊은 상흔 속에 살아가는 월트는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젊을 때부터 살아온 집에서 외로운 삶을 살아간다. 아들 둘과의 관계는 늘 서먹서먹. 그의 재산 목록 1호는 자신이 직접 만든 1972년 식 포드 그란 토리노. 아들이 일제 토요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자, 어떻게 미국인이 미국차를 타지 않고 일본차를 타고 다니냐고 혀를 찬다. 자식들 하는 짓은 하나도 마뜩한 것이 없으니, 이런 노인네를 좋아할 젊은 애들이 어디 있을까.

 

 

타오에게 자신의 창고에서 공구를 설명하는 월트 

 

 

무료한 생활을 하는 월트의 일상에 변화가 온 것은 이웃으로 몽족(베트남 전 이후 미국으로 망명해 온 라오스의 부족) 타오(비 방) 가족이 이사를 오고부터다. 자신의 삶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월트가 마음 문을 열 리가 없다. 타오가 월트의 그란토리노를 훔치려고까지 했으니... 그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종적 편견은 더욱 심해진다(비평가들은 영화 곳곳에서 월트가 내뱉는 인종편견적이거나 성차별적 언사에서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평소 터프한 연기를 해온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으리라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종차별적이라기보다는 약자를 돕는 서부극의 본질을 잃지 않았다고 보는 게 좋을 것임). 그런데도 월트는 점점 이들 몽족 이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들의 삶에서 뭔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어리라.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한 정? 그것이 분명하다.

 

 

생일 날 월트는 옆집 타오의 잡에 초대된다. "어떻게 자식들보다 이 동양놈들과 잘 통하지?"

 

 

월트의 생일 날, 아들 내외는 찾아와 입에 발린 말을 하지만, 속셈은 자신을 양로원에 보내려는 것이다. 월트는 아들 내외를 가지고 온 선물과 함께 쫓아내고 만다. 그날 월트는 타오 가족의 초청으로 그들의 파티에 참석한다. 파티에선 월트도 이방인이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몽족의 전통음식을 들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다. 월트가 한입 두입 먹으니 몽족 사람들은 너도 나도 더 먹으라고 월트의 앞에 음식을 가져다 준다. 음식 행렬은 파티가 끝난 뒤에도 이어진다. 월트가 손사례를 치는 데도 몽족 가족들은 월트의 집으로 음식을 가져온다.

인종적 편견에서 평생을 살아온 한 노인이 드디어 동양적 가치에 새로운 눈을 뜨는 순간이다. 이렇게 해서 월트와 타오는 세대를 뛰어넘는 친구가 된다. 월트는 타오의 연약한 심성이 안타까워 이태리 이민자 이발소로 데려가 남자들의 인사법을 가르친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머리 자를 수 있나, 이태리 똥개 새끼야!"

 

 

단골 이발소에서 타오를 남자로 만들고 있는 월트

 

 

이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들어간다. 타오와 (타오의 누이, 아니 허)는 착하게 살려고 아등바등 대지만 그게 쉽지 않다. 몽족 갱단이 지속적으로 괴롭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월트는 갱단을 찾아가 총을 겨누며 타오를 놓아주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갱단은 타오와 월트의 집을 총격으로 벌집을 만들어 놓고, 수를 집단적으로 폭행(윤간)하는 것으로 답한다. 월트의 분노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지 않는 한 타오 남매의 미래는 없다. 어떻게 이들을 응징할 것인가.

총잡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다시 총을 잡는다. 타오도 이 복수극에 참여하기 위해 월트의 집에 와 총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나... 갑작스런 반전. 월트가 타오를 지하실에 가둔 것이다. 나는 이미 손에 피를 묻힌 사람... 너의 손에 피를 묻히게 할 수 없다. 내가 혼자 가마.” 사랑하는 친구 타오를 살인자로 만들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고 가는 수밖에 없다.

 

 

자노비치 신부와 월트. 젊은 신부는 월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삶보다 죽음을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자노비치는 이 영화가 일반 서부영화와 다른 차원으로 매듭지워지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영화를 봄에 있어 또 한 사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7세의 젊은 신부 자노비치(크리스토퍼 칼리). 그는 월트의 아내 도로시의 장례를 집전한 신부로 수시로 월트를 찾아와 고해성사를 받으라고 한다. 아내의 유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트는 그것을 거부한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신부가 인생을 알면 무엇을 안다고... 그렇지만 월트도 마지막 결행을 함에 있어서는 신부를 찾아 수십 년만에 고해를 한다. 타오를 돕는 방법은 보복밖에 없다는 월트의 말을 듣고 자노비치는 망설인다.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하느님의 사도가 살인을 방치할 수도 없고... "그들이 존재하는 한 타오와 수는 행복해질 수 없어."(월트)


하지만 월트는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맹서를 한다. 월트가 과연 어떤 식으로 그것을 지키겠는가. 이 영화에서 나오는 종교(천주교)가 월트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이 영화는 종래의 서부영화와 다를 바가 없다. 그저 시대만 바꿔 리메이크한 것에 불과할 테니, 그것을 통해, 내가 감동받는 일은 별로 없으리라. 

 

 

몽족 갱단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타오

 

 

이제 영화의 막바지. 월트는 몽족 갱단이 사는 아파트를 찾고, 갱단은 총을 들고 그를 맞는다.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일촉즉발의 이 광경을 바라본다. 담배 한 대를 물고, 불을 붙이기 위해 안주머니에 손이 가는 순간, 갱단의 무차별 사격이 시작된다. 아, 이렇게 월트가 허무하게 죽다니...총 한방 쏘지 못하고...

그런데... 쓰러진 월트의 손에 한국전 당시 부대로부터 받은 지포라이터가 보인다. 월트는 총을 가지고 간 것이 아니다. 단지 갱단을 자극해 스스로 총알받이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중인환시리...갱단을 살인자로 만들어 그 모두를 감옥으로 보내려는 그의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이를 살신성인이라고 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자노비치 앞에서 회개한 총잡이의 약속이란 말인가. 분명 현대판 서부극인데... 이 장면에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월트의 재산목록 1호 그란 토리노

 

 

월트가 죽고 나서 가족들이 모였다. 유언장을 공개하는 자리다. 월트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주들은 자신들에게 올 유산을 생각하며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한 순간 표정이 일그러진다. 월트의 유언은 집은 교회로, 그란 토리노는 XX에게로. XX가 누구일까? 말하지 않아도 답을 알 것이다.

짧게 쓰려고 했지만 결국 스포일러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전하지 않은 게 많다. 월트와 타오 남매 간에 우정을 만들어 가는 그 애뜻한 감동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명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담백하고도 원숙한 그 명연기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거기에다 터프 가이만의 터프한 종교관! 백문불여일견!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