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시민운동가의 명암을 보여준 <미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여자>

박찬운 교수 2020. 8. 14. 21:42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지만, 자유주의적 측면에서 접근하면, 보수는 주로 공동체 그중에서도 국가의 이익에 경도된 입장을 취하는 반면, 진보는 개인의 자유에 초점을 맞춘다. 이와 관련해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적 이슈가 국기(국기 게양,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국가(國歌)(국가 연주와 제창)에 대한 태도, 국가에 대한 충성서약의 가부, 공적 장소에서의 기도나 성경 읽기, 동성애(성소수자)의 인권 인정 여부 등이다.

당신은 이들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가? 국가의 이익이 중요하니 아침마다 모여 국기에 대한 맹세 혹은 충성맹세문(oath of allegiance) 암송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보수다. 더욱 미국은 기독교 국가니 아침 수업 전에 기도문을 외우거나 성경 한 귀절을 읽게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보수다. 동성애자는 하느님의 법에 반하는 것이니 그들에 대한 인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보수다. 이 모든 질문에 그것은 모두 개인이 판단할 일이거나 사적 영역의 일로 공동체나 국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노'를 외친다면, 당신은 분명 진보다.

오늘 소개하는 영화는 이런 사회적 이슈를 일으켜 미국사회를 변화시킨 한 시민운동가의 전기 영화다. 이 영화는 단순히 한 인물의 일대기적 역사를 전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전기를 뛰어넘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있다. 영화는 그 시민운동가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한 인간, 그 중에서도 명망가의 명암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늘 아래 완전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Madalyn Murray O’Hair, 1919-1995(위키피디아)

 

 

2017년 토미 오헤이버(Tommy O’Haver)가 만든 <미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여자>(The most hated woman in America). 이 전기 영화의 주인공은 1960대 이후 약 30여 년간 미국의 유명 시민운동가로 활동한 매달린 머레이 오해어(Madalyn Murray O’Hair, 1919-1995). 영화로 그린 그의 일대기는 한마디로 극적이다. 치열하게 살면서 이름을 얻었지만 비극적으로 죽은 여자.


매달린(멜리사 레오)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뚜렷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부모 집에 얹혀사는 신세다. 결혼은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그녀에겐 두 아들(윌리엄과 가스)이 있다. 그녀는 젊은 시절부터 무신론자(atheist)로 자처하면서 종교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저항했다. 그 저항의 정점이자 그녀를 일약 사회운동가로 만든 것이 큰 아들 윌리엄이 다니는 공립학교(볼티모어 소재)의 성경읽기와 기도에 대한 법적 투쟁이다.

 

 

 

 

매달린이 '미국에서 가장 미움 받는 여자'라고 써진 표지의 잡지를 들고 웃고 있다.

 

 

 

윌리엄은 엄마를 따라 어린 시절 무신론자였지만 그가 다닌 학교에선 무신론자에 대한 예외가 없었다. 모든 학생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 기도를 해야 했다. 윌리엄은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학교에서 기도도 않고 성경도 읽지 않자, 친구로부터 왕따를 받고 선생님으로부터도 매일같이 혼나는 신세가 되었다.

매달린은 이런 사태는 헌법 위반이라고 판단하고, 아들을 원고로 내세워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가, 결국 1963년 미연방 대법원에서 역사적인 판결을 받아낸다(이 사건이 Murray v. Curlett인데, 이 건은 동일 쟁점을 갖는 Abilngton School District v. Schempp(1963)으로 병합되어 판결됨).

당시 연방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성경을 읽게 하는 것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정교분리원칙과 표현의 자유에 위반된다고 선언하였다. 대법원은 이미 그 전 해에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강요도 같은 취지로 위헌을 선언((Engel v. Vitlale(1962))했고 이 사건을 통해 공립학교에서의 종교강요는  위헌이라는 것을 확고히 선언했다고 할 수 있다.

매달린은 그 후에도 수십년 간 이와 유사한 사건을 무수히 법정으로 가져감으로써 미국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으나 미국 보수 기독교인들에겐 공적(公敵) 1호가 되었다.

 

 

‘전미 무신론자’(American Atheists) 로고(위키피디아)

 

 

매달린은 법정투쟁을 계기로 성공적인 무신론 시민운동을 일으킨다. 1963년 ‘전미 무신론자’(American Atheists)를 설립해 30년 이상 미국 사회의 보수종교와 일대 전쟁을 치른다. 그녀의 활동은 많은 동조자의 후원으로 이어졌고, 전국에서 후원금이 들어옴으로써 알게 모르게 부를 쌓는다.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지만 또 다른 면에선 매달린의 화려한 소왕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매달린은 1995년 둘째 아들 가스와 손녀 딸 로빈과 함께 납치 당했다.

 

 

 

그녀에게 점점 비극이 다가온다. 큰 아들 윌리엄이 그녀의 품에서 뛰쳐나가 버린 다음 오랜 기간 자신을 공적 1호로 부른 보수 기독교로 전향한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의 전조일 뿐.... 더 큰 비극은 바로 자신이 이끄는 단체에서 일어났다. 살인 전과자를 사무원으로 채용해 자신의 영업비밀을 공유한 게 화근이었다. 사무직원 데이비드 워터(조쉬 루카스)가 이끄는 범죄자 일당이 매달린과 둘째 아들 가스 그리고 손녀 딸을 납치한 것이다.


데이비드는 매달린이 후원금을 해외구좌에 빼돌려 비자금으로 관리한다는 것을 알고 그 돈을 가로채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렀다. 납치 후 데이비드 일당은 이들 가족을 위협해 해외구좌에 있는 60만 불의 돈을 인출하려고 시도해 성공을 눈 앞에 두었지만 사소한 문제로 결국 동전 한푼 주머니에 넣지 못했다.

당초 일당은 매달린 가족으로부터 돈만 받고 풀어줄 생각이었다(그렇게 해도 매달린이 약점이 많아 경찰에 신고하지 못할 것이라 봄). 그러나 납치 중 우발적인 사건(공범 중 1인이 매달린의 손녀를 강간하다가 살인함)이 일어나자 이들은 가스와 매달린을 차례로 살해한다. 미국 사회를 들었다 놓았다 한 한 시민운동가가 이렇게 운명을 달리했다.

 

 

 

매달린을 위협하는 데이비드

 

 

 

그녀는 방송 프로그램(토크 쇼)에 많이 나갔다. 방송을 많이 타면 막대한 후원금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대방은 유명 목사지만 그의 목표도 같다. 그도 방송에 출연할수록 후원금이 몰려온다. 공동의 목적이 있었으니 방송에서 그들은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며 시청률을 올린다. 매달린이 성경을 던지고 찢어버린다. 목사는 겉으론 성을 내지만 뒤에선 매달린의 그런 행동을 부추긴다.

 

 

 

방송 토크 쇼에서 유명 목사와 토론하는 매달린

 

 

 

매달린의 비극은 그녀가 자초한 측면이 크다. 그녀가 약점이 없었다면, 그녀가 살인범을 사무원으로 고용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 살인범에게 약점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녀가 일가족 살인사건이란 비운을 맞이할 이유는 없었다. 세상을 위한다는 매린다의 사회활동은 물욕에 눈을 뜨는 순간 비열한 장사꾼의 사업이 되고 말았다. 영화를 보면서 이 의미심장한 메시지에 내 자신 신발 끈을 동여매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달린의 큰 아들 윌리엄, 그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보수 기독교의 지도자가 되었다.

 

 

 

하나 더. 이 영화 맨 마지막 자막은 또 다른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매달린의 큰 아들에 관한 후일담이다. 그는 어머니와 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침례교 목사로서 그는 어머니가 이뤄 놓은 역사를 다시 돌려 놓기 위해 노력한다. 모든 학교에서 기도와 성경읽기를 부활시키는 것을 자신의 인생목표로 삶는다.


자료를 찾아보니 매달린은 큰 아들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놈을 영원히 받아들일 수 없다. 그놈은 인간이 용서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은 놈이다(beyond human forgiveness).”

피를 나눈 사이지만 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강이 흐르는 경우가 있다. 바로 이 경우가 거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들의 비운이 사회를 바꾸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