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슬픈...너무나 슬픈 감동, <밀리언 달러 베이비>

박찬운 교수 2020. 8. 11. 21:06

 

 

 

 

 

‘모쿠슈라... 영화의 막이 내려가면서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 이렇게 운 것은, 오랜만의 일이다. 나를 울린, 너무나 울린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연거푸 감동의 영화를 소개하는 데, 그것이 공교롭게 모두 클린트 이스트우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앞서 소개한 <그란 토리노>가 나오기 4년 전인 2005년 개봉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표작이다. 흥행은 <그란 토리노>가 더 성공했지만,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한 것을 보면, 작품성에 있어서는 이 영화가 한 수 위라는 평가다.

 

 

영화의 두 주인공 프랭키와 매기 그리고 탁월한 조연 에디

 

 

이 영화는 200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클린트 이스트우드, 얼 루디, 톰 로젠버그), 감독상(클린트 이스트우드), 여우주연상(힐러리 스웽크), 남우조연상(모건 프리만)을 받았으니, 감독이자 배우인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인생 최고의 영예를 안겨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몇 시간이 지났지만 울적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방법도 문화에 따라 다르다. 장례식장에서 소리를 내며 우는 한국인과 소리 없이 기도를 하며 지그시 눈을 감는 미국인을 보면, 분명 두 사람 간엔 넘기 힘든 강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켜, 겉으로든 속으로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그 표현방법이 다르다 해도 결코 다르지 않다. 이 영화가 그것을 증명한다.

 

 

어렵게 프랭키의 제자가 된 매기, 필사의 각오로 연습해 뛰어난 선수로 성장한다.

 

 

넷플릭스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그저 스포츠 영화로만 알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들었다면 그런대로 괜찮겠지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다지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이 많은 한 여자의 분투기? 그런 여자를 복싱선수로 키워내 뭔가를 이루어내는 성공 스토리? 그 정도의 이야기야, 누군 못할까?

그런데 마음을 바꿔 이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것은 <그란 토리노> 의 강한 감동 때문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 영화를 만들다니, 그렇다면 그가 그 몇 년 전에 만들어 아카데미상을 거머쥐었다고 하는 이 영화는 어떤 내용일까?

이 영화는 단순한 스포츠 영화가 아니다. 무명의 노처녀를 복싱 참피언으로 만드는 그런 통속적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는 두 사람의 주인공과 한 명의 조연을 통해 무엇이 참다운 삶인지, 무엇이 행복인지를 절절하게 들려준다. 영화는 조연인 에디 스크랩(모건 프리만)이 두 주인공의 삶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흘러간다.

 

 

 

 

프랭키 던(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는 황혼의 트레이너이자 매니저이다. 외동딸이 있지만 평생 가깝게 지낸 적이 없다. 틈만 나면 딸에게 편지를 쓰지만, 답장은 없고 반송만 있을 뿐이다. 흑인 선수 윌리를 수 년 간 키워 일류복서로 만들었지만, 어느 날 간단한 작별인사를 남긴 채 떠나고, 얼마 뒤 다른 매니저를 만나 참피언이 된다. 인간사에서 의리를 지키는 이는 귀한 법이다.

에디 스크랩(모건 프리만)은 왕년에 잘 나가는 복싱 선수였다. 그러나 그는 109번째 시합에서 선수로서의 삶을 끝냈다. 그날 강적을 만나 얼굴에 부상을 당했음에도 트레이너 프랭키의 말을 듣지 않고 시합을 강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부상으로 눈 하나를 실명하고, 프랭키의 체육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관리인으로 살아간다.

 

 

프랭키와 에디, 이 둘은 만나면 티격태격하지만, 사실은 깊은 우정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다.

 

 

이 영화 제목인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주인공 매기 피츠제럴드(힐러리 스웽크)는 서른 살이 넘은 촌뜨기 식당 종업원이다. 어느 날 매기는 프랭키의 체육관에 와 복싱 선수가 되겠다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떼를 쓴다. 그녀의 끈질긴 요구에도 프랭키는 요지부동. 아무런 도움 없이 연습을 해 나가는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는 에디. 그의 도움으로 마침내 프랭키가 매기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매기는 프랭키의 가르침 아래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내에 나이의 한계를 극복하고 빼어난 복싱 선수가 된다. 모든 게임은 1회전 혹은 2회전에서 상대를 KO패 시킨다. 그녀의 인기는 점점 올라가고 돈을 번다.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날, 프랭키는 매기 앞에 멋진 가운을 내놓는다. 등엔 스코틀랜드인이나 아일랜드인이나 알아 볼 ‘모쿠슈라‘란 이름이 써있다. 매기가 그 뜻을 알 리가 없으나 관중은 연신 모쿠슈라를 연호한다. 매기의 핵주먹에 영국 챔피언은 초전 박살난다.

 

 

세계 챔피언과의 경기, 야비한 챔피언의 가격으로 매기의 운명이 바뀐다.

 

 

드디어 세계 챔피언과 맞붙는 날이 왔다. 상대는 매춘부 출신의 독일 챔피언, 비열한 경기로 악명이 높은 복서. 경기료는 역대 급 금액인 백 만 불. 둘이 반반 나누는 호 조건이다. 이 경기만 이기면 매기의 꿈은 이루어진다. 경기는 초반 매기의 약세에서 시작되었지만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매기의 시간이 된다.

드디어 강펀치! 챔피언이 링 바닥에 떨어지고 심판은 카운트를 한다. 6, 7, 8... 승리를 확신한 매기가 자신의 코너로 등을 돌린다. 그 순간 챔피언이 일어나 매기의 뒷통수를 강하게 가격하고, 매기는 쓰러지면서 프랭키가 이미 올려놓은 나무의자에 머리를 박는다. 다 낚은 승리가 이렇게 종료되고, 매기는 경추신경을 다친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면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한다.

 

 

매기와 가족, 가족은 매기 인생에서 큰 짐이다.

 

 

매기에겐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지만 이 가족들은 야비하기 그지없다. 매기가 맞아가며 번 돈을 보내주고 집까지 사주지만 도통 고마워하는 법이 없다. 매기가 사경을 헤매자 이들은 변호사를 대동해 병원에 들이닥쳐, 매기가 죽으면 나올 보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손을 못 쓰는 매기의 입에 펜을 물려주며 서명을 요구한다. 그녀는 프랭키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내게 남은 건 당신밖에 없어요, 보스”

매기는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프랭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 내가 원하는 걸 얻었어요. 전부 얻었어요. 내게서 이 모든 걸 가져가지 말아줘요. 사람들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더 이상 듣지 못 할 때까지 누워있게 하지 말아줘요." 프랭키에게 안락사를 해달라는 것이다.

단호하게 매기의 요구를 거절하지만 프랭키의 고민은 커져 간다. 프랭키가 물끄러미 매기를 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모쿠슈라...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그것은 ‘나의 사랑하는...나의 혈육’(my darling, my blood)이야.“ 매기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엷게 미소를 지우면서... 매기는 이제 외롭지 않다. 프랭키의 사랑하는 혈육이 되었지 않은가?

에디는 프랭키가 매기의 마지막을 이렇게 해주었다고 조용히 말한다.

프랭키는 주사를 놓아줬지. 그 애가 다신 깨어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또 깨어나 고통을 겪을까봐서.... 그리곤 걸어 나갔지. 그의 모든 감정도, 그 순간 함께 죽었을거야.”

이 영화가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것은 슬픔 속에서도 두 주인공의 농담이 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당신은 나의 (죽은) 아빠 같아요.”(매기) “아니 너의 아빠가 그렇게 잘생겼다는 거야?”(프랭키)

75세의 나이에도 노익장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명화로 기록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 하나! 복싱 선수를 능가하는 연기력을 보여준 힐러리 스웽크, 그녀 또한 길이 길이 기억될 배우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