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박찬운 교수 2015. 9. 26. 19:32

어떻게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나는 단조로운 사람이다. 누구처럼 풍류도 즐기지 못하고, 잡기에 능하지도 않다. 돈깨나 벌고 사회적 지위를 갖추면 개나 소나 다 한다는 ‘공’도 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교수로서 해야 하는 연구와 강의 그리고 부수된 사회적 참여를 제외하고는,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 글을 쓰는 것, 마냥 걷는 것,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 여행을 가는 것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읽고 쓰고 걷는 것’이 나의 일과이자 삶이다.


나는 내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다.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살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것이 남에겐 그리 흥미로운 삶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운명, 즐거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 한편으로 깊이 생각하고, 또 한편으론 땀을 흘리겠다. 그것이 바로 에머슨이 말한 “think globally, act locally’의 실천방법일 게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틈틈이 마루야마 겐지의 책을 읽었다. 오늘까지 네 권을 읽었다. 마루야마의 글은 읽으면 읽을수록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글에 빠진다는 말은 그가 말하는 삶의 방식에 적극 공감한다는 말이다. 방금 전에 <그렇지 않다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라는 책 마지막 쪽을 넘겼다.


웬만하면 오늘밤은 그냥 넘기려고 했지만, 이 책 또한 정리해 놓지 않으면 후회가 될 정도의 무게감 있는 글로 가득 차 있다. 나를 위해 책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리고 이 글을 내 페북 공간에 올린다. 내 친구 누구든 이 공적 일기를 볼 수 있도록.


책을 정리하며 글을 쓰는 것은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다. 이것에 대해 마루야마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적으로 내가 동의하는 이야기다.


“읽는 것은 감상이고, 쓰는 것은 연주다. 연주를 하려면 당연히 거듭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몸에 익히는 노력을 오랫동안 참고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글을 써야 비로소 자신이 보려던 것이 선명해진다. 몸을 쓴 덕에 받을 수 있는 선물인 것이다.”(121)


마루야마는 소설가이자 정원사이다. 그는 젊은 시절 일찌감치 동경을 떠나 고향 나가노로 낙향해 해발 3천 미터 이상의 북알프스 고봉에 둘러싸인 곳에 집을 정하고 정원을 가꾸며 소설을 써왔다. 소설가로서 그는 정신적 노고의 산물인 소설과 산문을 창조한다. 한편 그는 정원사로서, 일 년 열두 달, 작다고 할 수 없는 350평 정원에서 쉼 없이 일하며 온갖 정원수를 돌본다.


이 책은 정원사로서 1월부터 12월까지 변화무쌍한 수목의 생장을 바라보면서 써나간 12장 인생론이다.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정원수를 결코 감상적인 눈으로만 바라 볼 수 없다. 정원수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생장을 위해 끊임없이 주변 환경과 투쟁한다. 소설가인 정원사는 이러한 투쟁을 예삿일로 보지 않고 그 자신이 자연의 일원이 되어 궁극의 예술로서의 정원 가꾸기에 매진한다.


“다른 장르의 예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정원 가꾸기가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은 결코 황당무계한 신화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감상자의 오감뿐만 아니라 영혼과 육체 전체에 강렬한 영향력을 끼친다.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의 힘을 갖고 있는, 참으로 희귀한 예술, 즉 궁극의 예술인 것이다.”(97)


그가 정원 가꾸기를 통해 배우는 것은 예술의 진정한 힘의 원천이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예술, 그의 문학은 미와 추라는 척도를 훨씬 초월한 생생한 현실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이라는 견고한 발판을 마련하지 않은 채 아름다움뿐인 세계를 아무리 치밀하게 구축한다 해도, 결국은 보잘 것 없는 환상일 뿐이다. 작품이 취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101)


마루야마란 인간을 보면 참으로 무미건조한 이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도대체 소설가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일 년 열두 달 노동에 몰두하느냐 말이다. 노동에 관심 없는 사람에겐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 이게,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내가 바라는 단조로운 삶의 본질이다.


“내가 구해 마지않는 것은 술과 여자, 도박 같은 일회성 고양감을 주는 것들이 아니다. 분수를 넘는 수입도 아니고, 크고 작은 권위에 굴복해 얻은 크고 작은 명예 따위도 아니다. 나는 500년 이상이어야 가능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깊고 무한에 가까운,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정도의 감동을 끊임없이 원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위한 창작 행위이며, 그것을 위한 인생이고 싶은 것이다.”(50)


생각해 보라. 작가는 사시사철 3천 고봉이 병풍처럼 늘어선 한 산골 마을에서 낮엔 정원 가꾸기를 하고, 밤엔 글을 쓴다. 어쩜 고독한 삶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게 바로 한 인간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고 스스로를 통치하며 자연과 합일하면서 사는 방법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가장 본질적 아나키스트의 삶의 모습이 아닐까. 소설가인 동시에 정원사로 사는 그의 인생관은 다음 구절에서 잘 드러나 있다.


“생각해 보면 철들었을 때부터... 사회 일원으로 단단히 자리 잡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의문을 품었다. 판에 박힌 흐름에 일생을 흘려보내는 대부분 사람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때로는 짜증을 느낄 때마저 있었다. 부모의 인생도 아니고 국가의 인생도 아니고 나 자신의 인생이니 마음대로 살아 주겠어라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권리라는 생각이 강했다. 안정되고 무난한 인생을 얻는 대가로 무엇을 잃을지 생각해 보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45)


나는 지식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내가 마루야마의 말에서 격한 공감을 느낀다면, 나 또한 무언가에서 ‘자신의 인생을 산다’는 것을 스스로 강하게 느껴야 할 것이다. 그는 소설쓰기와 정원 가꾸기를 통해 그것을 경험해 왔다. 나는 무엇에서일까? 과연 읽고 쓰고 걷는 것만으로써 그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오늘밤 내 스스로에게 주는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