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교육

대학 경쟁의 허와 실

박찬운 교수 2015. 9. 26. 21:21

대학 경쟁의 허와 실


[요즘 중앙대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중앙대 문제는 중앙대 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 모든 사학, 모든 대학의 문제입니다. 중앙대 문제는 대학 경쟁의 실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 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4년 전 이 문제를 경향신문의 한 시론에서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4년이 지난 오늘 이 글을 꺼내 읽어보니 한 자도 바꾸지 않고 다시 신문에 게재하고 싶습니다.]


12세기 이전만 해도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였다는 것이 세계사의 상식이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세계의 중심축은 급격히 유럽으로 기울어졌다. 유럽이 중국을 앞선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대학의 출현이다.


유럽에는 학문의 자유를 누리는 대학이 탄생하여 그 대학을 중심으로 사상과 과학의 혁명이 준비되었다. 이것이 세계사적으로는 르네상스와 연결된다. 르네상스는 학문의 자유를 누리는 대학이 없었다면 결코 유럽 사회에서 나타날 수 없는 문화현상이었다.


학문의 자유는 비판적 사고를 낳고 창조적 아이디어를 생산해 낸다. 그것이 바로 문명의 진보를 가져오는 핵심이다. 대학은 바로 이러한 정신이 넘쳐야 비로소 ‘큰 배움터’가 된다. 이런 눈으로 대한민국의 대학을 바라면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등록금 순으로는 세계에서 미국 다음이라 하지만 그 내실은 허약하기 그지없다.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어낸다고 호들갑은 떨지만 그 내면은 지극히 초라하다.


무엇보다 이 나라의 대학은 쓸데없는 대학 순위 경쟁에 목을 맨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학벌주의와 최근의 신자유주의의 결합으로 더욱 강화되는 추세다. 언론은 대학 이야기만 나오면 스카이(SKY) 운운하며 대학 서열을 공공연히 조장한다.


몇몇 신문사는 대학 순위를 매년 발표함으로써 자연스레 대학을 언론에 종속시키기까지 한다. 이 발표에 각 대학은 웃고 운다. 그뿐인가. 매년 미국과 영국, 이제는 이에 대항하여 중국의 언론까지 세계 대학의 서열을 발표한다. 자신들이 만든 기준으로 문화와 전통이 다른 해외 대학을 평가하니 이 보다 더 불공평한 것이 없다.


국내 대학들은 이 서열에 명함을 내밀기 위해 죽기 살기로 덤벼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쟁체제가 대학의 비판정신을 죽인다는 점이다. 순위를 올리기 위해 대학이 동분서주할 때 누군가 비판정신 운운하면 낙오자의 푸념 정도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요즘 우리 대학생은 영어와 스펙 쌓기에 청춘을 바친다. 전공은 의미가 없고 오로지 영어를 잘해야 하며 대기업이 요구하는 갖가지 경력을 쌓아야 한다. 부모 등골 빠지는 것을 알면서도 외국 연수의 무리수를 두지 않으면 안된다.


교수는 국제 경쟁 지수를 높이기 위해 한국 학생 앞에서 외국어 강의를 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각광받는 대학 운영방식은 기업식 경영이다. 인풋이 있으면 철저히 아웃풋이 있어야 한다. 길고 깊게 생각하는 사색은 사치에 불과하고 학문의 속성인 배우는 즐거움은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다.


사회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구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은 사람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만일 이런 것들이 미국 주도의 전 세계적 교육경쟁의 실체라면, 참으로 슬프지만, 그것은 교육제국주의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수는 각광 받는 직업일지는 모르지만 학자 본연의 삶을 살아가는 이는 많지 않다. 그들의 머리를 온통 차지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학문다운 학문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논문 수를 채우는가이다. 대학 간 경쟁이 곧 논문 수 경쟁이 되다보니 학문적 창조력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학자들이 후대에게 물려줄 역저를 내기는 과거보다 훨씬 어렵다. 대부분의 학교가 저서보다는 논문 한 편을 더 쓰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번역서에 대한 평가는 더 박하다. 우리 인문학이 고사되는 큰 원인 중 하나는 능력 있는 학자들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번역을 피하기 때문이다.


이제 큰 눈을 뜨고 대학의 미래를 생각할 때다. 도대체 대학의 역할이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경쟁을 하는가. 대학은 정부와 기업의 하청기업이 되어서는 안된다. 무분별한 교육제국주의의 포로가 되어서도 안된다. 대학이 제 길을 찾는 것이 우리 대학 개혁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대학은 기본적으로 학문을 하는 곳이다. 그곳에는 비판적 사고가 넘쳐야 하며 배움의 즐거움 속에서 사색하는 학인들이 득실거려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의연한 학자들이 학생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것이 종국적으로 이 나라의 대학을 경쟁력 있는 세계적인 대학으로 만드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