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교육

학문하는 자세, 샹폴리옹 그리고 나

박찬운 교수 2015. 9. 26. 20:48

학문하는 자세, 샹폴리옹 그리고 나


방학 중이지만 학교에 나오는 일은 학기 중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도 일찌감치 연구실로 나왔습니다. 오는 도중 전철 안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자세로 학문이란 것을 하는 것인가. 지난 번 이곳에 포스팅한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았습니다.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을 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막스 베버(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34쪽)


베버의 말을 다시 보니 한 사람이 생각납니다. 이집트 고대 상형문자를 해독한 샹폴리옹입니다.


나일문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 중 하나는 바로 상형문자입니다. 나일문명은 어느 문명보다 많은 문자 기록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이것은 문명사적으로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중국문명도 3천 년 전, 아니 그 이전에 갑골문을 남겼지만 나일문명은 그 이전, 지금으로부터 5천 년 전의 일을 문자로 남겼습니다. 아마 건조한 기후와 문자를 남긴 소재가 나무나 종이가 아니라 돌이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여하튼 나일문명은 기원전 3천 년부터 남긴 상형문자로 인해 어느 문명보다 정확히 역사를 추적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문명이 되었습니다.


원래 상형문자란 그리스인들이 ‘히에로글리프(hieroglyphs)’라고 한 것에서 유래합니다. 그리스어로 ‘hiero’는 ‘신성한’이라는 의미이고, ‘glyphe’는 ‘새기다’라는 의미이니, 상형문자의 의미는 ‘신성한 문자’라는 뜻입니다. 이 문자는 기원전 3천 년경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약 3천 년 동안 사용된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상형문자는 로마가 이집트를 지배하면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였는데 최후의 기록은 기원후 394년 8월 24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아스완의 필레 신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때는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가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이집트에 들어오면서 고대의 이집트 신전이 하나 둘 문을 닫게 되었고, 상형문자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상형문자가 사라진 것은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상형문자는 기원후 5세기 이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집트의 유적지에서 수많은 문자가 발견되었지만, 단지 그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렇게 1,500년이 흘렀고, 그동안 어느 누구도 상형문자를 해독한 이가 없었습니다. 나일문명은 그저 베일에 싸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상형문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새롭게 나타난 것은 공교롭게도 나폴레옹 덕입니다. 1799년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은 수백 명의 고고학자를 대동합니다. 아마도 젊어서부터 들어온 이집트 고대문명에 대한 관심이 발동한 모양입니다.


이 원정에서 프랑스 한 장교가 엘-라시드의 포트 줄리앙이라는 곳에서 화강석 석판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나폴레옹이 넬슨 제독에 패해 영국의 전리품이 된) 그 유명한 로제타 스톤이다. 오늘 보여드리는 사진은 제가 몇 년 전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높이 1.1미터, 폭 72센티미터의 석판에는 14줄의 상형문자(신관문자, 정통 상형문자로 종교적인 목적에 주로 사용하였음)와 32줄의 민용문자(상형문자를 좀 더 간편하게 만든 것으로 주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였음) 그리고 54줄의 그리스어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석판이 발견되자 사람들은 드디어 난공불락의 상형문자가 해독되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어와 상형문자를 대조하면 금방 상형문자의 문자 체계를 이해할 수 있고, 그로 인해 해독의 단서를 잡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해독한 것은 그 뒤 20여 년이 흐른 뒤였습니다. 천재적 고고학자 샹폴리옹이 나타나 이 문제의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샹폴리옹은 1808년 그의 나이 18세에 로제타 스톤의 탁본을 입수한 뒤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에 들어갔습니다. 고대 그리스어에 능통했던 상폴리옹은 파라오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이는 타원형 부분(카르투슈)과 그리스어를 비교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학자에 의해 그리스어 프톨레마이오스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진 부분이었습니다.


샹폴리옹은 파라오의 이름을 알파벳처럼 소리로 읽어야 하며, 각각의 상형문자가 독립된 글자를 나타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카르투슈로 이집트 상형문자의 알파벳 일부를 작성하였습니다. 샹폴리옹은 다른 연구를 통해 좀 더 많은 알파벳 기호를 알아냈습니다. 마침내 그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의미인 동시에 소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이에 따른 상형문자의 문법체계를 정리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로제스 스톤의 탁본을 입수한 후 14년이 흐른 1822년의 일이었습니다.


샹폴리옹의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지난 1,500년간 잊힌 글자, 이집트 상형문자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일강가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상형문자가 낱낱이 해독되었고, 이로 인해 나일문명의 역사를 확연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오랜 세월 닫혀 있었던 고대 나일문명의 관문이 열린 것입니다.


베버가 말한 학문하는 자세를 다시 한 번 떠올립니다. 샹폴리옹이 자신의 연구실에서 14년 동안 상형문자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그 끈기를 생각합니다.


학자라 함은 이런 자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가 바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래, 그렇게 박교수가 하면 되잖아” “한국의 샹폴리옹이 되어 봐”


모르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샹폴리옹 같은 학자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천재적 능력이 있었고, 거기에다 14년을 연구실에서 나오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끈기가 있었습니다. 저요? 저는 그 둘 아무 것도 갖추질 못했습니다.(사실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좀 놀고 싶어요!)


다만, 명색이 연구자니, 그런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흉내라도 낼 생각으로, 이 복중 더위에도 어디 안 가고 이렇게 연구실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대영박물관에서 찍은 로제타 스톤입니다. 자세히 보면 3단의 글씨가 보이지요. 맨 위가 상형문자, 중간이 민용문자, 마지막이 희랍어입니다. 이 돌판이 없었다면 고대 상형문자는 해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것이 샹폴레옹이 만든 상형문자와 알파벳 비교표다. 이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소리 나는 대로 상형문자를 쓸 수 있다. 아마도 웬만한 사람이라면 며칠 공부하면 자기 이름 정도는 상형문자로 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