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교육

학문하는 자세

박찬운 교수 2015. 9. 26. 21:14

학문하는 자세


중앙대 사태를 보면서 대학의 현실을 알았을 겁니다. 한국의 대학은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학문이란 기업과 권력을 위한 지식생산, 인간생산에 다름 아닙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대학에는 학문하는 사람, 학자가 있어야 한다고요.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라고요. 도대체 학자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학자일까요. 학자를 이루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만, 저는 오늘 학문하는 자세, 학문하는 이의 열정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어떤 학문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과 같은 현실에서 이렇게 말하는 게 참 어쭙잖은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상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한심한 현재를 이길 수 있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학문하는 사람은 하루하루의 현실에 굴복하는 지식 기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학문하는 이의 이상은 저 창공처럼 푸르고 높아야만 합니다.


학문하는 자세에 관해서 말할 때 막스 베버의 말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소책자에서 학자가 갖추어야 할 내적 자질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지요.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을 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막스 베버(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 34쪽)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전율합니다.

『나는 과연 어떤 문제에 ‘내 영혼의 운명’을 걸면서 침잠해 본 적이 있었는가. 그 문제를 풀지 않으면 내 인생은 없다는 각오로 몸과 정신을 불태운 적이 있었던가.』


베버는 이런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자—베버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학문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된다고 합니다—는 학문을 단념하라고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습니다. 한 대학의 연구실을 차지하고 있는 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제 딴에는 호기심도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딴에는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딴에는 업적도 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학문하는 자세는 멀었습니다. 소명과 열정에서 저는 아직 학자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절실함이 부족합니다. 학문의 문외한으로부터 조롱받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학문의 열매를 위해 인내하기보다는—천 년은 고사하고 단 몇 년도 참아 본 적이 있었는가!—하루하루의 만족을 위해 아까운 시간을 써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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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밤, 저는 조용히 반성하면서 이렇게 결심해봅니다.


학자로서의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교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도 고작 십년이다.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하자. 그것을 내 운명이라 생각하고 골방 속으로 들어가자. 인내하고 또 인내하면서 글다운 글을 쓰자.』(2015.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