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지혜

사진으로 읽는 인문정신

박찬운 교수 2017. 12. 20. 06:51

사진으로 읽는 인문정신


 

법학은 학문인가, 기술인가.

인문학이 유행한다. 서점에 가보라. 하루에도 수 십 종의 문··철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책들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인간과 자연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질문들이다. 우리는 어떤 시대에도, 어떤 상황에도 이런 질문에 답하지 않고 살 수 없다. 이 같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서 우리가 하는 일에 완전성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30년 이상 법학을 공부하면서 항시 무엇인가 공허함을 느껴 왔다. 원인을 생각한 즉, 우리가 배운 법학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한계 때문이었다. 우리의 법학교육에는 인간이란 주제가 없다. 법학은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행태과학임에도 인간 존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채워진 규범은 분명 어떤 인간을 전제로 할 때에만 그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 법률가들 대부분은 그 어떤 인간에 대하여 배운 바가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 법학이 단지 기능법학, 기술법학으로 폄하되는 이유이다. 누구는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 한다. 법학이 학문인가? “그것은 기술일 뿐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법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인문학 공부를 강조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인문학 공부를 그저 문··철에 관한 책 몇 권 읽는 것으로 오해하진 말라. 내가 중요시 하는 것은 인문학, 그 자체가 아니라 인문정신이다. 법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인문정신을 인문학을 통해 배우라는 것이다. 그럼 인문정신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오늘 내가 찍은 사진 몇 장으로 그것을 간단히 설명해 보려 한다. 사진 속에서 인문정신을 찾아 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 숨 쉴 때마다 느껴야 할 가치

법률가에게 필요한 제1의 기초는 자유의 정신과 그것에서 비롯된 비판정신이다. 서구에서 근대적 인문정신은 중세의 긴 잠을 깬 르네상스기에 나타났다. 이 시기 서구인들은 신의 시대가 너무나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인간의 시대를 맞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시대?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핵심으로 한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노예가 아니라는 깨달음, 그것이야말로 르네상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는 권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어떤 종교도, 어떤 제도도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 자유의 표출은 관습을 비판하고 권위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진1>을 보기 바란다.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 사진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가? 나는 이 법원청사를 볼 때마다 권위에 도전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 건물이야말로 한국 법조계의 권위주의특권주의의 상징이다


건물 자체가 높고 웅장한 데다 경사지에 위치해 있어 위압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주변의 다른 건물들은 고도제한으로 묶어 놓아 저층으로 건축되기 때문에 이 건물은 유독 높아 보인다. 더욱이 건물 준공 당시에는 법정동 5층까지는 엘리베이터를 만들어놓지 않아 변호사들을 포함한 모든 민원인은 법정까지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반면 판사들은 자신들의 사무실에서 법정으로 통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다. 판사들은 민원인들의 이런 불편함을 알고나 있었을까. 혹시 알면서도 이런 무식한 건물을 짓지나 않았을까


2000년대 초 변호사회의 지적에 따라 건물 준공 십 수 년 만에 뒤늦은 보수공사로 민원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내가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모시고 법정 견학을 갈 때마다 부끄러움에 식은땀이 났다. 한국 법조계의 권위주의, 특히 판사들의 특권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사진1>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박찬운

 

이제 <사진2>를 보자. 어떤 느낌이 드시는가? 서초동 법원청사를 보고 바로 여길 가면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건물이 주는 자유로움 때문이다. 법원 관계자들이 드디어 무엇인가 깨달았던 모양이다. 몇 년 전 서울행정법원과 가정법원이 서초동 종합청사에서 분리되어 이사 갈 때 강남대로변에 둥지를 튼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대로변 버스정거장에서 몇 발자국만 걸으면 바로 법원청사로 들어간다. 민원인이 아닌 행인들이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으면 이 건물이 법원 청사인 줄도 모를 정도다. 주변 사무실 건물과 비교하면 관공서 건물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건물을 볼 때마다 자유의 공기를 마신다. 권위주의가 저 멀리 도망쳐 가는 것을 본다. 건물 하나에서 자유와 권위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게 우리에게 필요한 비판적 인문정신이다. 이런 비판정신이 없었다면 서초동 법원청사에서는 아직도 민원인들이 엘리베이터 없이 비지땀을 흘리며 걸어 올라가고 있을 것이다.

 

<사진2> 서울 양재동 서울행정법원·서울가정법원 박찬운

 

사진 몇 장으로 인문정신을 이야기하면서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법조의 권위주의는 연구대상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것을 가능케 했을까? 짧게라도 내 생각을 내놓으면 대략 두 가지이다


첫째는 오랜 기간 지속된 관존민비의 유산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시민사회와 관의 힘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권력은 여전히 비대하고 무서운 존재이다. 그러다 보니 권력은 사람들에게 공포스럽지만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법률가는 이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특권의식을 갖게 된다


두 번째는 일제 식민통치와 해방 이후 기나긴 독재의 유산이다. 일제는 한반도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고등 협력자로 법률가를 키웠다. 당시 일본의 고등문관시험(그중에서도 사법과) 합격자들은 조선인 중에서는 최고의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조선변호사시험 합격자들도 나름대로 엘리트로서 엄혹한 시대에 상대적인 자유와 부를 누렸다. 이들이 모두 해방 이후 우리 사회 사법의 중추인 판·검사, 변호사가 된 것이다. 더군다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법률가들은 독재자의 폭정을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미화시키며 권력과 부를 누렸다. 여기에서 법률가들의 특권의식은 독버섯처럼 자랐고, 그 폐단을 우리는 아직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근본토대, 합리주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인문정신은 과학적 합리주의이다. 법률가는 누구보다도 진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대체로 과학적 합리주의에서 비롯된 믿음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어떤 지식도 그대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을 말한다. 만일 이러한 정신이 없다면 어떤 독재자가 나타나 특정의 이념을 강요해도 우리는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사진3>을 보기 바란다. 이 사진은 내가 20135월 스웨덴 웁살라 대학에 갔을 때 그곳 박물관(구스타비아눔)에서 찍은 것이다. 17세기 이 대학 해부학 강의실(anatomical amphitheater)의 모습이다. 가운데 탁자 위에서 시체 해부가 이루어지면 학생들은 원형극장 모양의 자리에서 그것을 동시에 보게 된다. 이 시설에서 교수는 여러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해부 실연을 보여주면서 강의를 했다. 서구에서는 언제부터 이런 시설이 만들어져 사용되었을까. 서양에서 해부학 강의실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594년 이탈리아 파도바대학에서라고 한다


우리 국토가 왜군의 침략으로 유린되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런 과학적 시설을 만들어 해부학을 강의한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산 조선의 의성 허준 선생이 이것을 보았다면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이 실험실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인들의 과학적 합리주의의 생생한 현장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의 장기 하나하나, 핏줄 하나하나를 살펴보는 초롱초롱한 젊은 의학도의 생각을 지배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는 어쩜 오기에 가까운 회의주의였다


여기에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명언이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시기 우리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고 하면서 인간의 신체에 칼을 대는 것을 금기시했다


분명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 한 세기 만에 서양의 과학주의가 궁극적인 지점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급기야는 금기의 대상이었던 사람의 신체까지 과학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그것이 그 후 서양이 세계를 지배한 중요한 원인이기도 했다. 이 사진 한 장으로 우리는 이 시기 서양과 동양의 과학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진3> 스웨덴 웁살라 대학 박물관의 해부학 강의실 박찬운

 

통합적 사고, 통섭

마지막으로 우리 법률가들에게 필요한 인문정신 중 하나는 통합적 사고, 곧 통섭(統攝)이다. 이 사고는 우리의 눈에 들어 온 하나의 장면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객관적 진리를 볼 수 있는 또 다른 눈을 의미한다. 하나의 장면과 그 이면에 숨은 것을 동시에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진리가 서로 연결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사진4>를 보기 바란다. 지난 가을 산책을 하다가 서울 성모병원 근처 한 육교 위에서 수많은 차들이 질주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나는 당시 저 차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차를 누가 개발하고 만들었을까. 필시 그들은 과학자요, 기술자일 것이다. 그러나 저 차들이 도로 위를 질주할 수 있도록 한 이는 과학자나 기술자가 아니다. 이 나라의 정치가나 행정관료들이었다. 만일 그들이 자동차의 유용성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면 저 길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만일 자동차 회사가 차를 팔기 위해 저 도로까지 만들어야 했다면 저 차들의 가격이 얼마나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10배는 더 비싸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비싼 가격이라면 자동차는 팔리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자동차 문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문적 사고는 이런 것이다. 한 장면 속에서 다른 것을 찾으려는 자세, 그 장면이 주는 메시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장면의 이면에 숨어 있는 수많은 스토리를 읽어 내는 것, 바로 그것이 인문적 사고이다.


<사진4> 서초대로를 질주하는 차량 대열 박찬운


법률가들이여, 우리에게 부족한 게 무엇인가. 인간과 자연의 본질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아는가. 법률의 의미만을 알고자 헤맸던 우리들의 시각이 너무 협소하진 않았던가.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이미지, 그것들이 내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가끔 인문적 사색을 하면서 걸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