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LUND 의 추억

사진으로 추억하는 룬드8(쉼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6. 1. 2. 22:26

8- 사진으로 추억하는 룬드

 

쉼에 대하여

-인간은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룬드 근처 비야레드 칼바드후스


연말연시 내겐 약간의 긴장감이 지속되었다. 일본군위안부 한일정부간 합의의 부당성을 알리는 일로 고군분투했기 때문이다. 아마 내 글을 읽은 독자들도 나로 인해 약간은 심적 부담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약간 이완된 글을 하나 쓰기로 한다. ‘에 대해서다.

 

쉼의 철학, 쉼은 권리다

인간은 일하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지만 인간이 그것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노동하면서 한편으론 쉬어야 한다. 노동과 쉼의 조화는 인간을 완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노동도 기본적인 권리이지만 쉼도 그에 못지않은 권리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보편적 인권기준을 정한 세계인권선언은 이 관계를 아주 극명히 알려주고 있다. 인권선언 제23조는 근로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제24조에선 여가의 권리, 곧 쉼의 권리를 보장한다. 그것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보자.


세계인권선언

24 모든 사람은 근로시간의 합리적 제한과 정기적인 유급휴일을 포함한 휴식과 여가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이와 같이 볼 때 우리는 어떤가. 아쉽게도 이런 철학이 없다. 아쉽게도 우리 헌법엔 이런 권리가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다. 헌법의 기초자들이 이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명문의 규정이 없다고 해서 우리 헌법이 의 권리를 부정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 헌법은 기본권에 관한 일반조항을 가지고 있는데, 그 조문을 통해 의 권리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우리 헌법 제10조가 정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이 바로 그런 일반조항이다. 대한민국에서 사는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러한 권리에 의 권리가 포함된다는 것은 이제 불문가지다.

 

서구사회에서의 쉼의 철학

서구사회에서 쉼의 철학을 갖게 된 데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이 크다. 그 이전은 서구사회도 기본적으로 농경사회였다. 도시가 있었지만 그 대부분이 인구 2-3만의 소도시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선 쉼이 특별히 강조될 필요가 없었다. 농민의 삶은 농업의 성격상 노동과 쉼의 경계가 불분명한 것이었고, 도시인의 삶도 성곽만 벗어나면 들판과 숲이었으므로 언제든지 자연 속에서 쉼을 누릴 수 있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서구는 도시화의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고 금새 도시는 만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고, 주거환경은 열악했다. 피곤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회는 위기를 맞이했다. 위기가 발전하면 혁명으로도 이어질 상황이었다.



미국 뉴욕 센트랄파크


런던 하이드파크, 런던의 허파다. 뉴욕 센트랄 파크의 원조다. 


서구 각국은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도시 내에 공원을 만들었고, 도시 주변에 호젓한 길을 만들었다. 주말을 이용해 노동자들이 쉴 공간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런던의 하이드파크, 뉴욕의 센트럴파크는 그런 역사적 배경 하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유럽 각국의 유명한 도보 트레일도 그런 배경에서 19세기 말부터 각광을 받았다.  


제주 올레길의 철학과 그 위기

우리도 이제 쉼의 철학을 정립해야 한다. 쉼이란 인간의 기본적 권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과 사회기반시설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대도시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거의 빵점에 가까운 도시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딜 가도 변변한 공원이 없다. 어딜 가도 쾌적하게 쉴 곳이 없다.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가 한 일이란 도시 속에 그저 콘크리트 건물만 지어댔던 것이다.



제주 올레길 


최근 들어 한국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제주도에는 올레길이란 게 생겼고, 지리산, 북한산 등지엔 둘레길이 생겼다. 이것은 산업혁명 후서구사회에서 시작된 도보 트레일의 한국판이다. 드디어 우리도 쉼의 역사적 발전단계에서 그 보편적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다만 주의할 점은 이들 길들이 대부분 관광객을 불러 모아 돈 버는 데 사용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쉼의 철학이란 관점에서, 쉼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 적절한 현상이 아니다. 보다 장기적 안목에서 이들 길을관리해야 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진정한 휴식공간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 길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인공적 개발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속가능의 발전 철학이다.

 

룬드에서 본 스웨덴 사람들의 쉼

스웨덴에서 1년간 체류하면서 내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스웨덴 인들의 쉼의 철학에 동참했던 순간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나는 스웨덴 사회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놀고 쉬었다. 이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두 가지만 소개한다.


하나는 콜로니얼 트로드고든(colonial trädgården) 이란 것이다. 이것은 도시 주변에 있는 주말농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트로드고든이 정원이란 뜻이고, 앞에 콜로니얼이란 말이 붙었으니, 아마도 이것은 '도시 주변에 있는 도시인들의 식민지'일 지 모르겠다.

 

룬드 근처 콜로니얼 트로드고든


룬드를 비롯해 스웨덴 어디를 가도 도시 주변에 이런 트로드고든이 꼭 있다. 나는 스웨덴 체류초기 기차를 타고 가다가 도시 인근에서 이상한 풍경을 보고 자못 놀랐다. 꽃이 핀 예쁜 정원에 아주 작은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개집이라고 보기엔 너무 크고 사람이 살기엔 너무 작은 집이었다. 저게 어떤 동네일까?


나는 순간 이게 스웨덴 사회에서 요즘 나타나고 있는 차별의 현장이라고 짐작했다. 매해 6-7만명의 난민이 들어오는 나라니 그들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겠는가? 도시 외곽에서 스웨덴 사람들보다 훨씬 작은 저런 집을 짓고 살지 않겠는가, 뭐 그런 생각이었다.


 

룬드에서 기차로 10분 거리인 란스크로나의 콜로니얼 트로드고든


스웨덴 친구에게 조심스레 그것을 이야기했더니 그 친구 박장대소! 그게 아니었다. 우습지만 나는 콜로니얼 트로드고든을 이렇게 알았다. 이 가든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약 1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웨덴도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들어왔다. 당시 그들의 주거환경은 별로 좋지 않았고 주말이면 갈 곳도 없었다.


그 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도시 주변에 고향집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도시 인근에 십 여 평 땅을 빌려 그곳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주말이면 그곳에 가서 하루 이틀을 보낼 수 있다면 고향의 향수를 달래긴 그만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도시 주변엔 도시인의 식민지가 건설되었다. 콜로니얼 트로드고든의 재미있는 역사다.

 

란스크로나 트로드고든, 가든 내에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콜로니얼 트로드고든은 스웨덴 인들에게 주요한 여가생활을 제공한다. 그들은 이 가든에 비록 두세 평도 안 되는 작은 집을 짓지만 온갖 정성을 들여 그것을 꾸민다. 부부가 주말을 보내기엔 손색이 없을 정도다. 어떤 노부부는 은퇴 후에 아예 그곳에서 살기도 한다.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다. 어떤 도시를 가도 이런 가든과 관련된 원예전문 가게가 꼭 몇 군데는 있다. 거기엔 각종 농기구며 화초씨앗, 정원 악세사리 등등 별별 것이 다 있다.


다음으로 룬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 여가시설이 칼바드후스(kalbadhus). 칼은 영어로 cold, 바드는 bath, 후스는 house라는 뜻이니 차가운 물로 목욕할 수 있는 집이란 뜻이다. 룬드 주변, 즉 스웨덴 남부 스코네 주엔 칼바드후스가 도시마다 한 개 이상 있다. 북쪽의 칼바드후스는 강이나 호수에 있지만 스코네 지방엔 발틱해 곧 바다위에 위치한다.

 


룬드 근처 비야레드의 칼바드후스, 아마도 스웨덴 전체를 통털어도 이만한 경관을 가진 칼바드후스는 없을 것이다. 해변가에서 600미터 길이의 나무 데크 다리를 건너면 저런 사우나 시설이 있다. 사람들은 사우나를 한 다음 물 속으로 뛰어든다. 겨울이면 바다가 어는 데 그 때는 사우나 주변 얼음을 깨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북극곰이 따로 없다.


칼바드후스를 실감나게 묘사하기란 쉽지 않지만 대체로 이런 것이다. 바닷가에서 100미터 혹은  500-600미터 길이의 나무 데크 다리가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놓여있다. 그 다리를 타고 가면 바다 한 가운데에 나무로 된 조그만 건물이 나타난다. 사우나 시설이다. 이 시설엔 사우나 도크와 일광욕을 즐길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식당이 있다.


사람들은 사우나 도크에 들어가 땀을 빼고 밖으로 나와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남녀노소가 바다 속에서 벌거벗고(!)수영을 한다. 여름에는 원하는 만큼 수영을 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들어가야 하므로 길어야 20초 정도 몸을 담글 뿐이다. 물에서 나오면 잠시 일광욕을 즐기다가 다시 도크로 들어가 땀을 뺀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이렇게 하루 종일 즐기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스코네 지방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보스타드 칼바드후스


나는 칼바드후스를 알게 된 후 광팬이 되었다. 사실 요즘엔 스웨덴 사람들 사이에서도 칼바드후스는 아는 사람만 이용한다. 나 같은 외국인을 칼바드후스에서 보는 일이란 극히 드물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알고 싶고, 보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이것이 내 좌우명 아닌가.


나는 룬드 체류 기간 중 틈만 있으면 칼바드후스를 다녔다. 그것도 스코네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각 시설의 장단점까지 파악했다나는 말뫼룬드 근처의 비야레드, 란스크로나, 헬싱보리스코네의 북쪽 끝 도시 보스타드 등의 칼바드후스까지 모두 경험했다규모나 편의성으론 말뫼가 가장 좋고, 경관으론 비야레드가 최고였다


아마도 자신 있게 말하건대, 스웨덴 남부 스코네 지방의 칼바드후스에 관한한 나만큼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내가 있었던 라울 발렌베리 인권연구소의 직원들도 칼바드후스에 관한한 내게 물어왔을 정도였으니


칼바드후스에 관한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만 말하고 이 글을 맺는다. 사실 창피해서 이 이야기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는데... 2013년 여름 귀국 전날 나는 마지막으로 말뫼 칼바드후스에 갔다. 그런데 이날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칼바드후스 내의 사우나 도크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조그만 플로우팅 아일랜드에 헤엄쳐 가보는 것이었다.


 

말뫼 칼바드후스, 나는 평상시 이곳을 이용했다. 이곳 사우나에 들어가면 멀리 덴마크 코펜하겐이 보인다. 플로우팅 아일랜드는 저 건물 뒷쪽에 있다.


1년 동안 사우나 도크의 창문을 통해 보니 스웨덴 사람들은 전나의 상태로 플로우팅 아일랜드까지 헤엄쳐 가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것도 연인들끼리 한참 바다 수영을 하다가 아일랜드에 올라가 일광욕을 즐기는 스웨덴 친구들을 보면 아담과 이브가 이곳에서 환생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내 수영 실력으론 아일랜드까지 가는 게 무리란 생각에 1년 동안 시도를 하질 못했다. 하지만 내일 귀국! 천추의 한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아일랜드를 향해 헤엄을 쳤다. 마침 물살도 그쪽 방향이라 50미터 떨어진 아일랜드까지 무사히 도착해 나도 벌거벗은 상태로 일광욕을 즐겼다. 거기에다 어떤 예쁜 스웨덴 아가씨도 전나의 모습으로 올라와 내 옆에 눕지 않는가. 나는 황홀경에 빠져 아일랜드 위가 마치 구름 위인 것 같은 착각 속에 몇 분을 보내고 말았다.


이제 돌아갈 시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무리 팔다리를 저어도 몸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물살이 바뀐 것이다. 갑자기 공포가 엄습했다. 몸은 굳어 갔고 자꾸 가라 앉기 시작했다. 사우나 쪽에 사람 들이 나를 보고 있어 헬프 미를 외치면 당장이라도 구명정을 던져줄 텐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창피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눈앞이 깜깜. 


!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손에서 땀이 난다. 물을 얼마나 먹었는지... 그러나 천우신조! 발틱해의 물은 우리 동해물처럼 짜지 않았다. 웬만큼 먹어도 숨을 쉴 수 있었다. 물배를 채운 상태에서 칼바드후스에 매여 있는 동아줄을 간신히 잡았다! 스웨덴 미녀들과 벌거벗고 발틱해에서 수영을 해보고자 했던 나의 만용은 이렇게 초라하게 끝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