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지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5. 9. 26. 20:43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에 대하여>


나의 주 관심사 중 하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다(맑스 말하길 세상의 철학은 세상을 해석만 했지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다 했는데 내가 그 꼴인 것 같다만...).

나는 오래동안 인권의 발전이 어떤 계기를 통해 이루어졌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해 왔다. 오늘은 그 과정에서 발견한 매우 중요한 하나를 나누고자 한다.(다 들으면 싱겁다 할 것이지만)

복잡한 설명을 쉽게 하는 방법은 예를 드는 것이다. 다음 상황을 잘 읽어 보기 바란다. 이것은 실제 있었던 상황이다.

상황(1990년 초)
변호사 갑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A를 변호하고 있다. 갑은 구치소에 구속되어 있는 A를 만나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접견을 신청했다. 그런데 변호인 접견실에 가보니 교도관 을이 입회하여 갑과 A의 대화를 듣고 메모를 하는 것이 아닌가.

변호인과 피의자의 접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밀접견이다. 피의자는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변호사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상황에서 과연 변호인과 피의자의 대화가 자유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러나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변호인 접견에 교도관이 입회하는 것은 법령의 규정에 의한 정당한 절차였다.

지금은 위와 같은 교도관 입회는 허용되지 않는다. 완전한 비밀접견이 보장된다. 법령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련법령이 바뀐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던가. 그것은 교도관 입회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1992년)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위의 헌재결정이나 법령 개정의 내용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변화가 가능했는가이다.

이 변화에는 어느 변호사의 결단과 행동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나의 관심사는 그 변호사의 결단과 행동의 원인을 찾아 보는 것이다.

어떻게 그 변호사는 그런 결단을 했고, 헌법재판소에 그 사건을 가지고 가게 되었을까?

그 변호사가 그런 일을 한 것은 분명 돈과는 관계가 없었다. 당사자가 돈을 싸들고 와서 그런 절차를 진행시켜 달라고 해서 한 일이 아니다.

이제 비밀접견이라는 제도 변화를 가져 온 갑 변호사의 행동을 단계별로 분석해 보자.

1단계: 갑변호사는 비밀접견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A를 변호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2단계: 당시 법령상으로는 교도관 입회가 적법하지만 갑변호사는 이것은 헌법상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단계: 갑변호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갑변호사가 위와 같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법률가로서의 적절한 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위 사건에서 갑은 헌법지식과 헌법재판을 하기 위한 절차적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정도의 지식은 대부분 법률가라면 갖고 있는 것이므로 갑변호사의 행동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다. 헌법지식을 갖고 있는 수 많은 변호사들이 수 십년 동안 비밀접견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은 게 증거이다.

갑변호사가 위와 같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비밀접견이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을 보고 분개했기 때문이다. 이 분개가 결국 갑변호사의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던 헌법지식을 끌고 온 것이다.

분개는 곧 감정이니 이것이 갑변호사로 하여금 이성적 결단(헌법소원)을 가능케 한 것이다.

나는 이 분개의 감정을 공감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피의자가 처한 환경을 이해하고, 피의자가 처한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이다. 이성의 힘이 아니라 감성의 힘이다.

이것은 조선조 성리학의 최대 논변, 4단7정론의 논쟁(사칠논변)의 연장선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위의 갑변호사의 행동을 이것으로 분석하면 <분개하는 기에 정의실현이라는 이가 탄 것이다.> 율곡의 말대로 기가 발하고 거기에 이가 탄 것이다(기발이승)!

고로, 나는 여기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 행동의 공통요소를 발견한다.

첫째는 공감능력이다. 이것은 선한 감성이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배워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가 없다.

두번째는 공감능력을 실천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배움에서 온다. 실력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분노는 분노로 끝날 뿐이다.

두 개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첫번째 공감능력이다. 이것은 두번째 실천능력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은 배우는데도 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