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지혜

진보와 보수에 대하여 그리고 나의 희망에 대하여

박찬운 교수 2015. 9. 28. 06:46

<진보와 보수에 대하여 그리고 나의 희망에 대하여>


일요일 아침이다. 하늘을 보니 오늘도 무척 더울 모양이다.


며칠 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진보란 무엇인가, 보수란 무엇인가?


오늘 아침 이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본다.

문자 그대로 진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보수는 ‘현재를 지키는 것’이다. 한 사회에는 분명히 이 두 가지 성향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우리 사회도 그렇다. 아니 어느 사회보다 이 성향간의 마찰이 심한 사회다.


진보주의자는 현재에 불만을 갖고 그것을 개혁해 새로운 현재를 만들려고 한다. 이에 대해 보수주의자는 현재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내일도 가급적 오늘이기를 바란다. 보수주의자에게는 현재에 문제가 있어도 그 원형을 버릴 수는 없다. 약간의 보수를 가하는 정도에서 현재를 고수하고자 한다.


나는 오래 동안 법률가 생활을 했다. 사법시험을 기준으로 하면 올해가 만 30년이 되는 해다.


나는 30년 동안 주로 이 사회에서 소위 진보주의자로 평가되는 사람들과 교분관계를 맺어 왔고, 대개는 그들과 보조를 같이 했다. 그러니 나를 진보주의자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내겐 비록 소수지만 보수주의자 친구도 분명 있다. 이들은 나와 성향도, 생각도 다르지만 버릴 수 없는 좋은 친구들이다. 이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잘 안다. 그들은 나를 특별히 비난하지도 않고, 또 자신들의 입장을 내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내 주변의 법률가들을 분석하면 대체로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다만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부류도 있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나의 동료들 중에서 자신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오늘 나의 관찰 범위 밖의 사람들이니 괜히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첫째 부류는 어려운 환경에서 나서 공부하다가 법률가가 된 사람인데, 이들은 젊을 때부터 이 사회의 모순을 몸으로 느끼면서 그 모순을 진보로 연결한 법률가들이다. 민변 변호사들이 대개 여기에 속한다. 물론 나 자신도 이 부류에 속한다.


둘째 부류는 어려운 환경에서 나서 공부해 법률가가 된 것은 첫째 부류와 마찬가지지만 일찌감치 현실과 타협하고 사회적 모순에는 눈을 감은 법률가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변호사가 되자마자 돈을 벌어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사회의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셋째 부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공부했고, 좋은 대학 나와 자연스레 법률가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개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 이들이야 말로 내가 말하는 진짜 보수주의자들이다.


30년 법률가 생활에서 나의 친구는 주로 첫째 부류였지만 셋째 부류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삶 속에서 진보와 보수는 내게 어떻게 읽혀졌는가, 이것이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법률가들에게서 느껴지는 진보와 보수의 감정은 사회 일반의 그것으로 확대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모습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토대에 대하여
진보적 법률가들의 절대 다수는 중산층 이하에 속한다. 법률가가 된 이후에도 이들은 중산층 그 이상으로 도약하지 못했다. 가끔 강남좌파가 나오긴 하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만약 그 어떤 법률가가 돈을 억수로 많이 벌었다면 그는 더 이상 진보를 말하지 못할 것이다. 축재와 진보는 함께 가기 힘든 법이다.


이에 반해 보수적 법률가들은 다수가 중산층 이상이다. 법률가가 된 이후 돈을 벌었고 몇 단계의 신분상승을 경험한 이들도 있다. 그런 사람이 아니더라도 선대의 도움으로 많은 돈을 벌 이유가 없는 변호사들은 변호사 초년 시절부터 경제적 신분이 다르다. 이들이야 말로 원조 보수주의자들이다.


사회현상을 보는 방법에 대하여
진보적 법률가들은 사회적 모순에 매우 민감하다. 권력의 부정이나 불법을 보면 즉각적으로 분개한다. 또한 이들은 사회적 약자의 아픔에 대하여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슬퍼하는 사람을 끌어안고 같이 우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세월호 사고가 터진 후 팽목항에 내려가 유족들의 대리인이 된 변호사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겐 예민한 공감능력이 있다.때문에 이들은 애통해 하는 이들과 촛불집회에 참여하여 함께 울고, 광장에서 밤을 새울 수 있는 것이다.


보수적 법률가들은 사회적 모순을 볼 때 그 예민성이 둔하다. 권력의 부정이나 불법을 보더라도 분개보다는 법치주의 하에서의 적절한 처리를 강조할뿐이다. 사회적 약자를 보더라도 이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것은 여간해서는 볼 수 없다.


한 마디로 공감능력에 있어서는 보수적 법률가들이 진보적 법률가를 따라 갈 수가 없다. 이들의 무딘 공감능력, 아니 냉철함은 이들이 사회적 모순을 발견할 때 쉽게 분개하면서 함께 모이는 것을 어렵게 한다. 보수적 변호사들이 분기탱천하면서 거리로 나가는 것을 본 일이 있는가?


그런데 한 가지는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만일 보수적 변호사들 다수가 모여 무엇인가를 강력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때는 어떤 현상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속성상 모이지 않는데, 이들이 모였다는 사실은 그 현상의 엄중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수적 변호사단체가 거리로 나오면 세상은 변한다.


일하는 방법론에 대하여
진보적 법률가들의 속성은 감성적이어 일하는 방법도 그런 성향을 보인다. 이들은 우선 찔러보는 방법을 잘 택한다. 거기에서 실수도 많다. 뒤에 가서 후회할 일도 많이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창조적이다. 지난 30년간 우리 사법부에서 인권을 증진하는 많은 판례가 나왔는데 거의 대부분이 이들의 창조적 활동에서 나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보수적 법률가들은 매우 냉철하다. 그들은 일처리에서 감정보다는 이성을 앞세우기 때문에 실수가 많지 않다. 판례를 존중하고 거기에 맞춰 실무를 해 나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보수적 법원에서는 환영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판례를 창조해 내지 못한다. 이들의 활동에서 인권이 향상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나는 이런 법률가들과 지난 30년을 살아 왔다. 나는 진보와 보수가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진보의 공감능력과 창조성, 보수의 냉철함과 이성이 함께 어우러질 필요가 있다.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면서 진보가 사회를 앞으로 추동시키려 할 때 보수는 수구로만 대응하지 말고 합리적 이성으로 진보를 설득하여 변화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아직도 그런 희망을 품고 사는 진보다.(2014. 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