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지혜

인권의식에 대하여... 나는 아직도 멀었다

박찬운 교수 2015. 10. 30. 16:53

인권감수성에 대하여... 나는 아직도 멀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일을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으니.


1984년 2월 어느 날 오전 나는 사법시험 1차 시험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시험지를 받고나서 30분도 채 안 되었는데 몸에서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다. 소변이 마려운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애석하지만...게임은 끝난 거다.


사법시험 1차 시험이란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고도의 긴장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제자는 매우 디테일한 부분에서 함정을 파놓기 때문에 수험생은 눈에 불을 켜고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래에서 이상한 신호가 온다? 그거 참 미치는 일이다.


아마도 시험에 대한 부담 때문에 전 날 잠을 제대로 못 잔 게 이 불상사의 근본적 원인이었다. 게다가 시험장에 오기 전 머리를 맑게 한답시고 카페인 많은 박카스를 한 두어 병 들이킨 게 치명적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30년이 지났지만 내가 박카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장실이야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다시는 시험장에 들어올 수 없으니... 그 해 농사는 그것으로 끝장인 것이다. 어떻게 할꼬? 밑져야 본전이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진 않은가. 나는 손을 들고 감독관을 불렀다. "저, 소변이 마려워 큰 일입니다. 화장실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감독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그렇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학생, 그건 규정 위반이야. 나도 어쩔 수 없어."


아, 이것으로 끝이구나!. 망연자실! 마음이 급해지니 문제가 아예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몇 분 후


누군가 내 등을 두드린다. "학생, 잠시 뒤로 나와 봐요. 화장실 갈 것 없이 여기다 하지." "에? 여기서요"


참, 난감했다. 앞 줄엔 여학생도 한 명 있는데...그러나 어찌하랴. 나는 허리띠를 풀렀다. 그리고 쓰레기통을 향해 몸 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모든 수분을 분출해 냈다. 아, 몸이 편안해진다! 이제 살 것 같다.


그 덕에 나는 그 해 사법시험 1차 시험을 합격했고, 연이어 2차, 3차 시험을 합격해, 법률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감독관님, 감사합니다. 당신이 나를 오늘에 이르게 한 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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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어느 기사를 보니 어떤 친구가 31년 전 나와 똑 같은 상황에 처했던 모양이다. 그도 국가고시에 도전했고, 나와 똑 같이, 시험을 보면서 소변이 마려웠다. 그리고 감독관의 선처에 의해 교실 뒤에서 실례도 했고...어쩜 그리도 똑 같았을까!


그런데 그 뒤의 스토리는 나와는 땅과 하늘이다. 이 양반은 그 순간을 인권침해 상황으로 인식했다. 그는 국가인권위원회에 그 상황을 인권침해라고 주장하면서 진정을 했다. 진정 내용은 보지 않아도 알겠다. 인간의 생리적 현상을 무시한 시험감독규정은 인간의 존엄성에 반한다? 뭐 그런 거 아니었겠는가.


결과? 기사에 의하면 인권위는 "국가고시 시험장서 용변 보게 한 건 인권침해"라고 결정을 했단다.


명색이 인권법 교수인 내게 진정인이 이 사건을 가지고 와서, 이게 인권침해냐고 물어본다면,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 듣는 순간, "아, 지금 세상에도 인간의 생리적 현상을 가로막는 시험감독규정이 있단 말입니까? 그거야 당연히 인권침해지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 과거를 생각하면서, "이 보세요. 그 감독관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 감독관이 얼마나 당신을 배려한 줄 아세요. 아, 당신이 화장실에 들어가 부정행위를 할 지 누가 압니까? 시험은 공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거기다가 꼭 인권문제를 갖다 대야겠어요?"


나는 솔직히 이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을 못하겠다. 이것이 내 인권감수성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란 자신의 경험에서 한 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건 아닐까?


관련 신문: 

http://media.daum.net/society/labor/newsview?newsid=20151029170205118

국가기술자격시험 도중 응시자의 화장실 사용을 제한해 시험장에서 그대로 용변을 보게 한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결정이 나왔다.

29일 인권위에 따르면 박모(54)씨는 2014년 10월 5일 국가기술자격시험(기사)을 보던 중 용변이 급해 감독관에게 화장실을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감독관은 규정상의 이유로 박씨의 요청을 거절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은 국가기술자격시험의 공정한 관리를 이유로 시험 중 화장실 이용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 한국산업인력공단의 방침에 따르면 배탈ㆍ설사 등 용변이 매우 급한 상황이거나 시험 시간의 절반 이상이 지난 후에야 화장실 출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럴 경우에도 재입실은 불가해 퇴실할 때까지 작성한 답안만 인정하고 있다.

용변이 급했던 박씨는 감독관에게 시험장 안에서라도 용변을 볼 수 있게끔 해 달라 재차 요구했고 감독관은 다른 응시자들의 양해를 구한 뒤 박씨에게 시험장 뒤편 쓰레기통에 용변을 보도록 했다. 당시 시험장에 있던 응시자들은 모두 박씨와 같은 남성이었으나 여성 감독관 1명도 있었다. 박씨는 “시험장에서 용변 문제로 수치심과 굴욕감을 느꼈다”며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이 국가기술자격시험을 총괄ㆍ관리하는 주체로서 부정행위를 방지해야 하는 책임은 있다”면서도 “화장실 출입 후 재입실 금지 원칙을 고집해 응시자를 시험장 뒤편에서 소변 보게 한 것은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하는 인격권 침해”라고 판단했다. 인권위는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에게 이 같은 제도를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이번 인권위의 결정이 다른 국가시험 제도에 영향을 줄지 주목된다. 현재 인사혁신처가 주관하는 국가공무원시험의 경우도 시험 도중 화장실 출입이 불가능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화장실을 갈 수 있지만 재입실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반대로 교육부가 주관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경우 시험 도중이라도 동성의 감독관이 동행한 상태에서는 화장실 출입이 가능하다. (한국일보 2015. 10. 30) 김현빈기자 hbkim@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