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실천 문학가 임헌영의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읽고

박찬운 교수 2021. 11. 10. 09:12


“제가 가장 선망하는 빅토르 위고는 ‘진보’를 "인류의 집단적 걸음걸이" 이자 "국민들의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이념의 시대가 갔다고 우려도 인류는 영원히 진보합니다. 그건 진리입니다. 진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미래이며 희망입니다.”(책 서문 8쪽)

방금 전 <문학의 길 역사의 광장>을 다 읽었다. 몇 달 전 나온 문학가 임헌영의 일대기를 그와 한양대 유성호 교수가 대담한 책이다. 700쪽의 두툼한 볼륨이다. 십여 년 전 리영희 선생의 일대기를 선생과 임헌영이 대담한 책이 <대화>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이 책은 그 책과 견줄 수 있는 책이다.

<대화>는 주로 리영희 선생의 쓴 책을 중심으로 선생의 생각을 듣는 것이었다면, 이 책은 문학가인 임헌영이 말하는 당대의 문학과 정치 그리고 역사 이야기다. 그의 가족사, 민족사, 세계사가 종횡으로 엮어져 있어, 찬찬히 읽다보면 독자는 해방시대로, 자유당 시대로, 유신시대로, 전두환 시대로 들어가 우리 선배들의 그 신산한 삶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 책장을 넘길 때는 호기심으로 읽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겸손한 마음으로 읽고 또 어느 순간부터는 외경의 마음으로 읽었다.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 다양하고 긴박하며 성실하다니!

“이 대화는 한국 근현대 문학사를 활달하게 가로지르고 있다. 선생이 읽어온 책들, 관심을 가졌던 사건들, 거기에 세계사적 변동 과정을 개입시켜가는 현란한 독법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점은 이 책으로 하여금 ‘비평가 임헌영’의 개성적인 식견과 문장과 취향을 담은 문학사가 되게끔 해준다. 그런가 하면 이 대화는 한국 근대사의 흐름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전개된다. 민족수난사와 함께 ‘실천가 임헌영’의 면모가 선명하게 재현될 때마다 우리를 숙연하게 때로 뜨겁게 해준다. 이때 이 책은 문자 그대로 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역사적 관점을 암시해주는 한국 근현대사로 몸을 바꾼다.”(대담자 유성호 교수의 ‘치열한 민족의식의 언어로 풀어낸 대화록’ 본문 697-698쪽)

선생은 1941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안동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대학(중앙대)에 들어가 문학도의 길을 걸었다. 집안은 한국전쟁의 참화를 정통으로 맞아 아버지는 좌익으로 죽임을 당했고, 형은 월북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정치가 한 인간 한 집안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를 몸으로 체험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문학은 시작된다. 참여문학이란 말로 정리할 필요도 없이 그의 문학은 정치, 역사, 민족의 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

선생은 1966년 ‘현대문학’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해 지금까지 55년간 문학가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방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글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 한국사에 자신을 헌신의 도구로 내놓는 일에 몰두했다. 역사문제연구소의 일원으로 한국 역사 바로잡기에 나섰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소장으로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데 심혈을 쏟았다.

그가 발을 딛고 동지들과 이룬 업적은 끝이 없다. 그 중에서도 내가 대학시절 탐독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의 주 필자로 참여한 것만으로도 우리들 기억 속에 남는다. 선생의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결국 두 번의 영어의 몸을 만든다. 70년대 대표적 조작사건인 문인간첩단 사건, 남민전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중년 이후를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녔다.

하지만 선생에겐 행복한 나날도 많았다. 무엇보다 그는 살아오면서 대한민국의 최고지성을 여한없이 만나 그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조정래를 비롯한 셀 수 없는 문인들, 리영희 선생을 비롯한 시대의 은사들.... 이들과의 만남 그 자체가 그에겐 배움이자 역사 속의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나는 길이었다.

그의 삶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이 백화점에서의 문학교실이다.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의 문화강좌를 연 것은 아마도 생활고가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고상한 문학가라면 백화점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것을 거리의 악사정도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만난 강남의 여유 있는 사람들(주로 주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들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면서 그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수필>. 무려 400명이 넘는 문학가들을 탄생시켰고 그들이 지금 한국과 해외에서 문학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이런 방식으로 읽는 것도 큰 배움이다. 앞으로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양심들이 생의 황혼기에서 이런 책을 많이 냈으면 좋겠다. 그것을 읽는 후배들이 분명 감동을 받을 것이고 그것이 그들을 이끄는 북극성이 될 것이다.

나도 바람이 있다면 머지 않은 장래에 이런 책을 한 권 내는 것이다. 내 삶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그런 책, 나는 과연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는지.... 그 시간을 위해 좀 더 분발해야겠다. 경험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삶! 성실하고 겸손하게 사는 삶!(2021.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