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인생/문학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박찬운 교수 2021. 10. 14. 21:55


며칠 동안 짬을 내 소설 한권을 읽었다. 미국 작가 메리 앤 섀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지난 주 넷플릭스에서 본 동명의 영화를 보고 나서, 그 감동이 가시기 전에 책을 주문해 읽었던 것이다.

메리 앤 섀퍼는 사실 무명 작가다. 2008년 74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했지만, 그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작가라는 소리를 들은 적은 거의 없다. 그녀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소도시에서 평생을 살면서 사서와 서점 직원으로 일한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다. 다만 그녀는 다정다감한 가족들과 형제들에 의해 둘러쌓여 항상 이야기 꽃을 피우는 환경에서 살았다. 그녀는 가족과 형제들에겐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라자드와 같은 이야기꾼이었다. 평생 책을 끼고 살았던 그녀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누구나 출판하고 싶은 소설 한 권을 쓰는 것이었다.

그녀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으로 평생의 꿈을 이루었다. 이 책이야 말로 누구나 출판하고 싶은 바로 그런 책이었으니 말이다. 애석한 것은 그녀가 세상 사람들이 그녀의 책을 얼마나 좋아한지를 보지 못했다는 것. 그녀는 갑자가 찾아온 병마에 쓰러졌고, 출간 직전 편집자가 원고수정을 요구했지만 그것마저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책이 완성된 것은 그녀가 죽고 난 다음. 그녀의 조카이자 작가인 애니 베로스는 이모가 심혈을 기울여 쓴 이야기를 편집자의 의도대로 수정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책은 출판되자마자 날개 도친 듯 팔려 일약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출간 10년이 된 2018년에는 아름다운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 각국의 영화팬을 매료시켰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 독자는 이 편지를 읽어가면서 자연스레 등장인물들의 삶을 그려 나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 줄리엣 애쉬턴. 줄리엣은 30대 초반의 여성으로 2차 대전 중 영국의 유명 신문에 칼럼을 연재해 명성을 얻은 유망작가다. 소설은 건지섬의 도시 아담스라는 남자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줄리엣이 소장했던 찰스 램의 책 한 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녀의 주소를 발견하고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두 사람 간의 편지 교환으로 전쟁 중 건지섬에 감자껍질파이북클럽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 알려진다.

건지섬은 영국해협에 위치하는데, 영국 본토보다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더 가깝다.
건지섬은우리나라 울릉도 보다 조금 큰 섬이다. 면적 78 평방킬로미터. 인구 7만. 소설 속에서 줄리엣은 세인트 피터 포트에서 내린다.


건지섬. 이 소설을 읽을 때까진 내 지리 상식 속에 없던 섬이다. 영화를 보면서 호기심이 생겨 구글 지도로 찾아보니,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영국해협에 위치한 작은 섬이다. 위치만 보면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가까운데(섬에서 프랑스가 보인다고 함) 이 섬은 윌리엄 정복 이후 영국왕실 소유였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섬은 바로 독일 수중에 들어간다. 영국이 본토 수호를 위해 이 섬의 방어를 포기한 것이다. 건지섬은 독일 치하에서 5년간 신음하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곳에서 큰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섬사람들은 전쟁 중임에도 유럽대륙과는 달리 비교적 평온하게 지냈다. 그렇다고 편할 리가 있었겠는가. 5년이란 긴 세월 동안 섬사람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끝없는 질곡에서 헤매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의 그날은 꿈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았다.

건지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우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원래 이 소설에 나오는 건지섬 사람들은 평소 책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지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섬사람들이었다. 전쟁의 굶주림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시절 아멜리아 모저리가 어느 날 돼지구이 파티를 연다. 섬에 그 많던 돼지가 독일군에 의해 모두 징발되어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옥에 갈 상황이었지만, 지혜로운 아멜리아는 지하실에서 돼지 한 마리를 키우다가, 어느 날 이 돼지를 잡아 이웃들과 단 한 끼 포식을 한 것이다. 일행들이 파티를 마치고 귀가하는 중 독일군의 검문을 받는다. 이 때 엘리자베드가 기지를 발휘해 자신들은 북클럽 회원이라고 하면서 그날 독서회가 있었다고 둘러댄다. 그 북클럽 이름이 그날 파티에서 먹은 감자껍질파이!

엉겁결에 만들어진 북클럽은 도시를 비롯한 섬사람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했다. 섬사람들은 이 북클럽을 통해 우정을 쌓았고 그것은 엄혹한 시기를 이겨갈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평생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못했던 섬사람들이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토마스 칼라일, 제프리 초서, 찰스 디킨스, 찰스 램, 세네카, 세익스피어 등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고 살찌웠다.

줄리엣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옮기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운명 같은 사랑을 확인한다. 그녀는 건지섬에 가기 전 미국의 사업가 마크 레이놀즈로부터 청혼을 받지만, 섬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맡길 이는 마크가 아니라 돼지치기 농부 도시임을 확인한다. 혹자는 이 소설이 줄리엣과 도시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한 작품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쪽 시각으로 보면 이 소설은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줄리엣과 도시의 관계 발전을 통해 알려준다. 농사꾼이지만 어딘가 지적이고, 무뚝뚝하지만 어딘가 정이 넘치는 도시, 그는 줄리엣에게로 기우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결코 사랑한다는 말을 못한다. 더욱 줄리엣에게 부잣집 청혼자가 있지 않은가. 줄리엣 또한 도시가 영 자신에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둘을 맺게 한 것은 작가의 마지막 결단이다. 소설의 맨 끝에서 줄리엣이 도시에게 달려가 청혼을 한다. 이 소식에 진짜 기뻐한 인물들은 줄리엣을 어릴 때부터 알아온 단짝 친구 소피와 그의 오빠 시드니다. 그들은 줄리엣이 언젠가 도시의 아내가 될 줄 알았던 것이다.

북클럽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역시 엘리자베스. 그녀는 원래 런던 출신으로 전쟁 전에 건지섬에 와서 정착한 인물로 용기와 정의가 넘치는 여인이다. 그가 있었기에 북클럽이 만들어졌고, 그가 있었기에 북클럽의 구성원들은 더 큰 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적군의 장교와 사랑을 나누며 아이(킷)를 낳았다. 도망 노동자를 숨겨주었고 그 때문에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거기에서 동료 수용자를 학대하는 관리인의 횡포에 항거하다가 총살당했다. 인간성이 말살된 현장에서도 참다운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준 엘리자베스. 북클럽 회원들은 엘리자베스의 이런 행동에 빚진 자들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그녀를 영원히 추억하고 산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킷은 모두의 자식이 되었다.

소설은 영미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관계가 우리와는 사뭇 다른 차갑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얼마나 큰 편견인지를 깨닫게 된다. 줄리엣과 단짝 친구 소피, 소피의 오빠이자 출판사 사장인 시드니와의 끈끈하면서도 아름다운 우정, 건지섬 사람들 상호 간의 관계, 특히 도시, 엘리자베스, 아멜리아, 이솔라가 서로를 응원하며 험난한 시기를 살아가는 모습들, 엘리자베스의 아들 킷을 키우는 북클럽 회원들의 정성.... 이런 것을 읽다보면 그들의 사랑과 우정은 우리를 왜소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든다. 그만큼 그들의 사랑과 우정이 매우 농도 짙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난 다음 조용히 생각해 본다. 이만큼 맛깔스러운 소설이 어디에 있을까. 문장 하나하나가 섬세하다(이런 감동을 선사하게 된 것은 번역자 신선해의 공이 크다). 이 소설은 한바탕 수다 떨기라고도 할 수 있다, 난롯가에 모여 앉아 친구들이 밤을 새워 웃고 떠들고, 때론 울기도 하면서 하는 이야기... 누구도 끝을 모르고, 누구도 끝을 바라지 않는 이야기다. 동이 터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비로소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5년간 독일군 치하에서 살면서 북클럽의 주인공들이 겪은 이야기를 어찌 한권의 소설로 풀어놓을 수가 있으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내가 이 소설을 5년 전 읽었다면 나는 분명 건지섬을 가고야 말았을 것이다. 2016년 여름에서 겨울까지 나는 런던에서 머물렀다. 건지섬은 런던에서 비행기로 30분 정도, 배를 탄다고 해도 몇 시간이 걸리지 않는 곳이다. 아마 런던 남쪽의 항구 도시 웨이머스에서 오후 배를 탔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저녁 무렵 배는 건지섬에 닿을 텐데, 은빛 바다에서 바라다보는 건지섬의 풍광은 줄리엣이 처음 건지섬에 발을 디딜 때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동안 소설의 장면 하나하나를 상기하면서 섬의 이곳저곳을 천천히 걸어 다녔을 것이다. 언제 그런 기회가 올까. 다음에 런던에 가면 꼭 한 번 시도하고 싶다.

소설을 읽으면서 좋은 친구들과 독서회 하나를 만들고 싶어졌다. 과거 한참 책을 읽을 때, 나도 독서회에 참여한 적이 있지만, 어느새 먼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늙어가면서 특별한 오락도, 딱히 특별한 취미생활도 없이 단조롭게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뜻 맞는 친구들과 모여 서로 읽은 책을 나누는 모임, 와인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깊은 밤을 함께 보내는 그런 모임... 정말 즐겁고 아름답지 않은가.

하나 더.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 오르는 바람이 있다. 그 바람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소설을 하나 써야겠다는 것. 어떤 글도 소설을 따를 수는 없다. 소설은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 아니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한권의 책에서 말한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작가가 말하지 못한 것은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면 된다. 일생의 첫 작품을 쓴 메리 앤 섀퍼의 소설을 통해 건지섬과 거기에서 전쟁의 상처를 보둠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의 상상력은 이제 그 이상을 향해 달려간다. 작가가 또 다른 밤을 새워 쓰고자 했지만 못 다한 이야기를 나는 나의 머릿속에 채울 수 있다. 그녀는 단서를 제공한 것으로 족하다. 나는 또 다른 건지감자껍질파이북클럽을 꿈꾼다. 나도 언젠가 이런 소설을 쓰리라 생각한다. 단 한권의 소설. 누구나 그 책을 읽고 감동하고, 누구나 출판하길 바라는 그런 책. 나는 도전할 것이다.

2018년 개봉된 마이클 뉴얼 감독의 &amp;lt;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amp;gt;.줄리엇 에쉬톤 역엔 릴리 제임스, 도시 아담스 역엔 미힐 하위스만


진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영화는 비교적 소설의 핵심을 잘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 소설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영화에서 말하지 못한, 그렇지만 들을만한 이야기가 정말 많다. 소설을 보고 영화를 보기보단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소설을 보고 영화를 보면 자칫 영화가 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는 비판자의 눈보다는 그저 영화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 좋다. 내가 줄리엣이 되고, 도시가 되어서 건지섬 한 가운데에 있어야 밀물처럼 밀려오는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2021.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