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박물관

영국이야기 27(박물관7) 영국박물관에서 만난 로마황제들의 초상화

박찬운 교수 2016. 10. 31. 04:55

 영국이야기 27(영국박물관이야기7)


영국박물관에서 만난 로마황제들의 초상화

 

 

 로마제국 초상화, 영국박물관 70번방


대리석 조각상이 입체 초상화라?

아마 유럽의 유명 박물관에 가본 사람들은 보았겠지만, 그들 박물관에는 그리스 로마시대 조각품(sculpture)이 적지 않게 전시되어 있다. 개 중에는 그 설명문에 로마황제 누구, 철학자 누구의 초상화(portrait)라고 쓰인 것이 있다 

초상화가 무엇인가. 누군가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다.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으면 초상화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 얼굴을 소재로 한 다른 장르의 예술품일 뿐이다. 오늘날 초상화는 대체로 캔버스 위에 그린다. 서구 역사에서 보면 캔버스 위에 그린 초상화는 대체로 1516세기 르네상스 이후 대중화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른 재질 위에 그린 초상화가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것들은 오늘날 보기 힘들다. 보존가능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전 시대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내구성이 특별히 긴 소재 위에 그린 것일 수밖에 없.

비잔틴제국은 세라믹 혹은 유리를 사용한 모자이크 벽화 초상화를 남겼다. 그 이전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벽화 초상이 어느 정도 남아 있다. 이집트문명이나 지중해 문명권에는 건조한 날씨 덕에 2천 년 이상 제대로 보존된 벽화가 꽤 있다. 빛은 바랬지만 그런대로 형태를 알 수 있고, 때론 놀라울 정도로 보존이 잘된 것도 있다.

 

영국박물관 70번 방 내의 로마 초상화. 남성의 흉상인데 자세히 보면 두발 및 수염까지도 자세히 표현되어 있다. 그저 돌을 사용한 입체 초상화라고 생각될 정도다.


로마시대의 대리석 조각상엔 이렇게 채색까지 한 모양이다. 이 사진은 내가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에서 찍은 것이다. 로마시대 조각상이 초상화였음을 관람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그리스 로마제국 시절에 만들어진 초상화 중 으뜸은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이다. 조각상이 초상화라니? 조금 의아해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조각상은 그저 인간의 상상이 가미된 예술품이지 그것이 어찌 초상화가 될 수 있는가

하지만 서구 박물관을 돌아다니면서 2천 년 전의 조각품을 꾸준히 본 결과, 조각품 아래에 쓰인 ‘PORTRAIT’라는 글자는 그냥 쓰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단어가 뜻하는 대로 그 조각품은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당대의 황제나 정치가 혹은 철학자의 실제 얼굴을 그린 초상화였던 것이다한마디로 말하면 입체 초상화라고나 할까?

로마 황제들은 이런 조각상 초상화를 수없이 만들어 제국 곳곳에 보내 공공장소에 놓아 두었다. 자신이 바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귀족들도 이런 초상화를 만들어 집안의 거실에 놓아두길 좋아했다. 황제와 유사한 초상화를 통해 한 집안의 주인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23번 방 그리스 로마 조각관 내에 있는 그리스 철학자들. 이들 초상화는 그리스 시대 만들어진 것을 로마제국 시절 재현한 것이다. 왼쪽부터 소크라테스, 안티스테네스, 크리스포스, 에피쿠로스. 유럽의 어느 박물관에서 가서 같은 이름의 철학자의 대리석 초상화를 보게 되면 같은 얼굴임을 알 수 있다.


돌로 만든 초상화이기 때문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초상화의 주인공 얼굴을 알아보는 데엔 지장이 없다. 조각상에 따라서는 세밀도가 다르지만 많은 조각상이 초상화에 걸맞게 실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덕에 우린 거의 이 천 수백 년 전에 태어난 스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 아닌가.

내가 고대 그리스나 로마제국의 조각상을 본 곳은 유럽의 여러 박물관이다. 그중에서도 세 곳 박물관에서 유난히 많은 조각상을 보았는데, 그게 영국박물관,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 그리고 코펜하겐의 칼스버그 글립토데크미술관(약칭 칼스버그 미술관)이다. 오늘 이 이야기에선 영국박물관의 초상화(70번방) 를 기준으로 설명할텐 데, 필요한 경우 다른 두 박물관의 초상화도 함께 보도록 한다.


최고의 로마황제 트라야누스

오늘 초상화의 첫 번째 주인공은 이들 황제 중 로마제국을 반석 위에 올린 이로 통하는 트라야누스(53117, 98117년 재위). 그는 히스파니아(스페인) 출신의 황제로, 재위기간 중 전선을 누비면서 로마제국의 지경을 넓힌 장본인이다. 지금의 루마니아 지방인 다키아를 정복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파르티아 왕조를 격파하여 국경선을 유프라테스 강까지 넓혔으며, 북부 아프리카에서는 사하라 사막의 경계까지 군대를 주둔시켰다.


트라야누스, 영국박물관(A)

 

트라야누스, 코펜하겐 칼스버그 미술관(B)


이렇게 해서 로마제국의 지경은 지금의 지중해 연안 대부분으로 확장되었고, 지중해는 로마인들에게 우리의 바다’(Mare Nostrum)가 되었다. 지금도 로마 시내 한가운데에서 그의 공적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포로 로마노 근처에 우뚝 솟아 있는 트라야누스 기둥이다. 이 기둥은 전승 기념비로, 벽면에는 다키아 전투 장면이 생생하게 부조되어 있다. 당시의 전투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사람들은 바로 이 기둥의 부조를 해석함으로써 당시 전투를 짐작한다.

서설이 길어졌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우선 사진부터 보고 말을 이어가자. 한 장(A)는 영국박물관에서 찍은 것이고, 다른 한 장(B) 칼스버그 미술관에서 찍은 것인데, 모두 트라야누스 황제의 초상 조각이다. 이들 조각품이 정확히 어디에서 출토(발견)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두 개의 조각품이 모두 트라야누스 황제의 초상 조각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로마제국에 대한 일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조각상을 보자마자 트라야누스의 것임을 알아맞힌다. 언젠가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 중 우연히 로마의 한 대학에서 고고학을 연구하는 젊은 교수를 만났다. 이야기 도중 그의 전공분야가 로마제국 시기의 고고학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임자 만났다는 생각에 내가 들고 다니는 카메라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 중 로마황제 사진을 쭉 끄집어내어 보여주면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 사람은 사진을 보자마자 오현제를 비롯하여 나도 미처 기록해놓지 못한 조각상의 이름을 모조리 알아맞히는 것이었다. 거기서 나는 다시금 깊이 깨달았다. ‘로마 조각상은 역시 그냥 예술품이 아니구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초상화구나.’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그린 초상화 말이다.

어떤 조각상이 초상화가 되기 위해서는 그 수에 관계없이 누가 보아도 같은 사람을 조각했다고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적어도 대상의 특징이 정확하게 조각에 반영되어야 한다. 트라야누스상의 경우 헤어스타일(짧은 곱슬머리), 눈과 코 그리고 이마가 거의 동일하다. 기법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일인이 제작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들 조각상은 트라야누스라는 특별한 사람의 얼굴을 동일한 기준에서 여러 사람들이 조각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영국박물관(C)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칼스버그 미술관(D)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 칼스버그 미술관(F)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오현제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 중 하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161180년 재위, 사진 C, D).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국어 교과서에 명상록이라는 글이 있었는데, 바로 그 글의 주인공이다. 그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전쟁터에서도 항상 책을 읽고 명상에 잠겼으며 그것을 글로 옮겨놓은 철학자 황제이다. 사실 기원후 2세기 말 아우렐리우스가 황제가 된 시점부터 로마제국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변방의 이민족들은 점점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기 시작했고, 국경 지방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는 거의 전 생애 동안 변방의 전쟁터를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식 교육은 제대로 시키지 못한 모양이다. 그의 뒤를 이은 콤모두스라는 인물은 방종하기 짝이 없는 로마제국 최악의 황제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러셀 크로가 나오는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바로 이 황제가 나오는 영화이다. 여하간 그는 힘이 세었던 모양이다. 항상 몸이 근질근질했던지 자신이 직접 검투사가 되어 원형 경기장에 나가길 좋아했다. 당시 그는 로마 시내 한가운데 세워진 콜로세움에서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 이제 두 부자를 한번 보자(특히 위 사진 중 D, F). 보는 순간 우리는 탄성을 지르게 된다. 같은 인물은 아니지만 어딘가 닮았다는 생각에 말이다. 이 초상을 보면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라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얼굴 전체의 형태, 곱슬머리, 수염 등이 조금씩 다르지만 한눈에 보아도 부자관계임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콤모두스의 어머니, 그러니까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의 처인 포스티나(G)는 정조 관념이 희박한 여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콤모두스가 과연 아우렐리우스의 친자인지에 대하여 의심을 한다. 그럼에도 이 두 개의 초상 조각에서 많은 유사점을 찾을 수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그 원인은 두 가지 가정 중 하나일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처 포스티나, 영국박물관(G)


하나는 콤모두스가 아우렐리우스의 친자식으로, 진짜로 두 사람의 용모가 비슷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그렸고, 따라서 두 개의 조각품은 서로 닮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째는 콤모두스가 친자가 아니었다는 가정이다. 그 경우 두 사람의 용모는 상당히 달랐을 텐데, 어떻게 두 조각품이 부자관계로 인식될 정도로 비슷해졌을까

작가에게는 콤모두스를 친자의 모습으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황제와 그 자식을 다르게 그리면 그 결과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온전히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혹은 황실로부터 처음부터 두 사람이 닮은 것처럼 만들라는 요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 요구는 누가 했을까. 당연히 아우렐리우스보다는 요부 포스티나가 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로마시대의 도덕관념으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이다. 어디에 해당할까? 이것을 아는 이는 사실 아무도 없다.

로마의 초상화가 항상 인물의 실제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은 위와 같은 경우 외에 다른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초상화도 사진이 아닌 바에야(사진도 조작이 가능하다!) 그리는 목적에 따라서 실물과 차이가 나기도 한다. 로마황제의 초상화는 대부분 정치적 목적에서 만들어졌을 테니 실물에 가까운 경우라도 정치적 목적에 따라 대부분은 신민에게 위엄을 보일 필요에 따라 어딘가 과장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에서 본 트라야누스의 초상화도 위엄을 보이기 위해 어딘지 모르게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얼굴 인상이 강인하고, 몸은 마치 운동선수처럼 군살 없이 다부지다. 설마 황제가 이런 몸을 만들기 위해 온갖 운동과 다이어트를 했겠는가. 


미소년 애인을 둔 하드리아누스

로마황제의 초상화는 또 다른 복잡한 이유에서 실물과 다르게 표현되기도 했다. 아름다운 연인과 비교되는 황제의 얼굴을 그릴 때는 그 연인과 짝을 맺을 정도의 과장된 아름다움이 작가에게 요구되었을 것이다. 오현제 중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76138, 117138년 재위, 사진 H 및 I, J의 각 왼쪽 초상화)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다음 황제인데, 그 또한 트라야누스와 마찬가지로 히스파니아 출신이었다. 하드리아누스가 통치한 이 시기는 로마제국 역사상 정점의 시기였다. 그는 팍스 로마나의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선제가 만들어놓은 국경선을 확실하게 관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 황제이다. 그래서 그는 황도 로마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으며, 길바닥에서 대부분의 세월을 보냈다. 제국 전체를 쉬지 않고 여행한 것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과 로마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한 각종 기념물을 만들었다. 지금도 지중해 곳곳에 남아 있는 하드리아누스의 문이나 도서관은 바로 그가 여행 중에 남긴 건축물이다.

그런데 이 황제는 안티노우스라는 미소년을 사랑했다고 한다.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그는 안티노우스를 너무나 사랑해 제국 순행 시 항상 그와 동행했다. 그러다가 이집트를 순행하는 중 안티노우스가 나일 강에 빠져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게 단순 사고사인지 아니면 자살인지에 대하여 말들이 많다. 자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안티노우스가 나이를 먹으면 황제가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로 자살을 선택했다고 한다. 일리 있는 가정이다.

여하튼 안티노우스는 익사했다. 그러자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위해 이집트에 도시(안티노폴리스)를 만들고 그를 신격화했다. 안티노우스는 죽은 후 신이 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는 하드리아누스가 안티노우스와 함께 초상화를 만들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소년의 얼굴과 어울리는 정도로 만들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드리아누스, 칼스버그 미술관(H)


 하드리아누스와 그의 애인 안티노우스, 영국박물관(I)



하드리아누스와 안티노우스,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J)


여기 그림을 보라. 사진 (H) 하드리아누스 초상화는 언뜻 보아도 (I) 및 (J) 상의 하드리아누스와는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당히 다르다. (H)는 그저 평범한 황제의 얼굴이다. 하지만 (I)와 (J)의 하드리아누스는 왠지 품격이 다르다. 얼굴의 전체적인 균형미가 앞의 하드리아누스 에 비해 뛰어나고, 무엇보다 귀티가 난다. 그런데 이 귀티 나는 초상화와 안티노우스의 초상화를 한꺼번에 같이 보자. 뭔가 어울리지 않는가.

만일 안티노우스와 하드리아누스 (H)가 함께 있다면 어떨까. 영 그렇다. 한눈에 어울리기 어려운 커플이다. (I)와 (J) 하드리아누스는 요샛말로 하면 포샵을한 것이다. 실제보다 훨씬 로맨틱하게 얼굴에 덧칠을 하였다는 말이다. 이것을 담당한 로마의 작가는 초상화 작가로서는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사례비를 두둑이 받는 궁정화가의 비애이자 운명이지 않았을까?


*위 글은 필자의 저서 <로마문명 한국에 오다> 제1장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위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