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박물관

영국 이야기 17(박물관4) 영국박물관 67번 방

박찬운 교수 2016. 9. 20. 16:56

영국이야기17(영국박물관 이야기4)


영국박물관 67번 방

 

한국 내에 있으면 우리의 장래에 대해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 정치, 경제 어느 것도 제대로 굴러가질 않는다. 당장 어떻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 때도 있다. 거기에다 이젠 지진까지 일어나니 근심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나라에 긍지를 가질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외국에 나오면 한국이란 나라의 달라진 위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한국은 과거의 한국이 아니다. 영국 땅에서 한국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아는 바 없는 그 사람의 무식을 탓해야 한다. 


영국박물관 67번 방 한국관


아마도 한국인으로서 가장 기분 좋은 것은 유수한 박물관에 한국 전시물을 만날 때일 것이다. 경제는 압축경제가 있다고 했지만 문화나 역사에서 압축문화 혹은 압축역사는 없다.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라고 하는 영국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에 어느 특정 국가의 전시물 나아가 독자적인 전시관이 있다는 사실은 그 나라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그들이 인정해 준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와 전통이 없는 나라의 유물이나 문화재를 그 세계적 박물관들이 소장하거나 전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관 내의 전시품,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의 자기류가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영국박물관 67번 방에 들어갈 때마다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느낀다. 그곳이 바로 이름하여 한국관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선 오로지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만이 국가 이름을 단 전시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규모야 중국이나 일본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독자적인 전시관을 영국박물관이 만들었다는 것은 한국의 국력과 문화 전통에 대한 예우가 아닐 수 없다.


한국관 내의 최고 걸작, 달항아리(일명 Moon Jar)


더욱 영국박물관에 들어가면 오디오 가이드가 대한항공 후원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한국인들은 문 앞부터 어깨가 으쓱해진다. 요즘엔 박물관 이곳저곳에 한국 대기업의 로고가 붙어 있어 그 또한 한국의 국력을 실감한다.


며칠 전 박물관에 가보니 한국 국악 연주단의 추석맞이 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사한 박물관 공연장에서 3일 연속 연주를 한다는 것이다. 열 일 제치고 공연장을 찾으니 관객 대부분이 순수 영국인이 아닌가! 한국 관중은 가물에 콩나듯이 있었다.


한국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옥, 민속박물관도 아닌데...


20년 전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 한 가운데서 당시 지구상에선 존재조차 몰랐던 그 한국이 이런 대우를 받다니.... 한국은 정말 예전의 한국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만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영국박물관 67번 방을 들어갈 때마다 좀 더 나은 한국관을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 속에 한 동안 나오질 못한다. 지난주에도 그랬다. 한참 동안 전시물을 보고 이웃방인 중국방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한 숨이 나왔다. 한국인으로 긍지를 느끼고 들어갔던 내 마음이 중국방을 통해 나올 땐 주눅이 들어 있었다. 왜냐고? 전시물의 압도적인 차이 때문이다.


중국 도자기관의 단일 채색 도자기류, 모두 경덕진 자기다. 현대 도자기와 비교해도 조금도 그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 걸작들이다. 유럽인들이 왜 중국 도자기를 좋아했는지 이곳에 가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규모나 전시품의 수로나 한국관이 중국관과 같을 순 없다. 하지만 뭔가 의미 있는 전시를 한다면 대한민국의 문화적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중국관은 현재 운용 중인 전람실 이외에도 시대에 따른 대규모 전시관이 따로 있는데 그것은 지금 대대적으로 리모델링 작업에 들어가 있어 당분간 관람이 안 된다. 그래서 대부분 관람객들은 현재 운용 중인 중국 도자기 전시관(95번 방)을 보러 오는 데 그게 바로 한국관 옆방이다.


한국관의 전시내용을 보면 그 전시품이 대부분 자기류이다. 영국인들이 아시아에서 볼 것은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한국관엔 고려자기와 조선 백자가 사실상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크지 않은 전시관에 한옥 기와집을 지어놓아 전시관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한 것도 선뜻 이해가 안 된다. 영국박물관이 생활사 박물관이라면 몰라도....


과연 이 의미 있는 전시공간에 저 정도의 전시품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를 고려해 보아도 전시품의 수나 질 모두 빈약하다. 그 정도 가지고서는 대한민국의 문화와 역사를 세계인들에게 보여주기엔 역부족이다.

 

어제 런던대학(소아스)의 한국학연구소 소장이면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하는 샬롯 홀릭 교수를 만나 이 이야기를 나눴. 그 양반만큼 영국에서 이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전문가도 없을 것이기에 나는 내 생각을 가감없이 전달했다.


나는 그에게 한국관에 도자기를 중심으로 전시를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한국 바로 옆에 중국이 있는데 한국관에 도자기, 그것도 수에 있어서 중국과 비교가 안 될 소량의 도자기를 전시하는 경우, 관객이 어떤 생각을 가질 지를 물었다. 아마, 그는 이에 대해서 크게 생각을 안 했던지 매우 당황해 했다.


그(녀)는 영국박물관에서 제대로 된 한국 소장품을 확보하는 게 쉽지 않고 지금 전시도 사실 코리아 파운데이션의 협력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돈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우리가 모를 바가 아니다.


나는 그에게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보편적 관점에서 세계인들에게 보여줄 전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게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도자기가 아니다. 나는 그게 기록문화라고 생각한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실의괘 같은 것을 여기에 갖다 놓는다면(비록 원본이 아닌 영인본이라도), 또는 한글과 관련된 몇 가지 오리지널 기록물을 갖다 놓는다면(영국박물관은 여간해서는 레블리카를 전시하지 않는다고 함), 관람객들은 분명 한국의 뛰어난 문화에 대해 감탄할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해 우리 정부가 어느 정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이왕 영국박물관에 한국관을 만들었다면 그것을 통해 문화민족임을 보여주는 보다 확실한 방법을 취하는 게 우리나라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게 아닐까한국의 박물관이 정기적으로 영국박물관에 소장품을 대여해 주는 방법은 어떨까

한번 대한민국의 문화부장관이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함께 이 영국박물관을 방문해 문제점이 무엇인지 점검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같다.

(2016.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