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박물관

영국이야기25(박물관5) 계몽주의와 영국박물관

박찬운 교수 2016. 10. 22. 13:57

영국이야기 25(영국박물관이야기5)


계몽주의와 영국박물관

 

영국박물관 1번방, 이곳에서 계몽주의 산물로서의 영국박물관의 설립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일반적인 영국이야기를 하다 보니 한참 동안 영국박물관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오늘은 내가 있는 런던대학 바로 옆의 영국박물관에 대해 말해보자.


늘 이야기는 어떤 특정 전시품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영국박물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이 이야기는 원래 이 시리즈의 2번째 정도 나왔어야 할 것이었다). 나는 지난 2달 동안 이 박물관을 10회 이상 가 보았다. 갈 때마다의 느낌? 한마디로 헤아릴 수 없는 그 많은 소장품에 기가 질린다. 가기 전엔 무언가 한두 가지라도 제대로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가도 가는 족족 머리가 어지러워 길을 잃고 만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봐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이다.


이곳의 소장품이 정확히 몇 점인지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약 1천여 만 점의 소장품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진 않다. 이곳의 소장품은 한마디로 망나적이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문화와 관련된 물건들이 5대양 6대주에서 수집되어 이곳으로 옮겨져 소장되어 있다. 그 소장품의 다양성과 규모에서 이 박물관을 따를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 더욱 비전문가가 이곳에 와서 그 소장품을 보았을 때, 현기증을 느끼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

 

1번방의 그리스 시대 각종 토기 병


그럼에도 누군가가 나에게 이 박물관의 관람 요령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무슨 답을 할 것인가? 오늘 이 글을 쓰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영국박물관을 어느 정도 의미 있게 관람하기 위해서는 이 박물관의 설립의도에 대해 대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을 이해하고 박물관 전체를 주마간산격이라도 둘러보면 나름 머리에 남는 게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 방문자의 특별한 관심이 있는 소장품에 대해 좀 더 시간을 갖고 살펴본다면 방문 목적은 훌륭히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영국박물관의 설립의의는 보통 계몽주의에서 풀어가는 사람이 많다. 맞는 말이다. 이 박물관은 분명 18세기 유럽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박물관 설립자들은 계몽주의의 전도사로서 이 박물관을 만들었다. 때문에 이 박물관에 오기 전에 서양사의 한 장을 장식한 계몽주의에 대한 이해를 하고 오는 게 좋다.

 

로마시대의 조각품, 이들 대부분은 그리스 고전시대의 조각품을 재현한 것이다.


우선 계몽(啓蒙)이란 의미부터 알아보자. 이것은 영어 enlightenment의 번역어다. 영어 enlightenment어둠을 깨운다는 말이다. 한자 계()깨우다라는 말이고 몽()어둠 같은 혼미한 인간의 의식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계몽은 인간의 비합리적인 의식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역사를 보면 17세기 이후 이런 지성사적 움직임이 활발해 진다.


그 이전의 상황을 거칠게 신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이 시기부터는 인간의 이성이 중시되는 인간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신의 시대에서 인간은 무지몽매했지만 인간시대에 접어든 상황에선 그렇게 살 수 없다. 어둠 속의 의식을 완전히 꺼내 밝은 빛 아래 놓아야 한다. 이제 인간은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서도 이성의 눈으로 관찰하고 사고하면 자연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계몽주의 시대 서양인의 사고였다.

 


1번 방 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 출토품


영국의 계몽주의는 17세기 이후 대륙과의 교류 속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영국의 국력이 쎄어지고 유럽의 맏형 노릇을 하게 되는 18세기에 이르면 오히려 대륙이 갖지 못한 사고를 함으로써 유럽 계몽주의의 선도자가 된다. 사상사적으로 보면 17세기 정치사상가 로크 이후 경험주의 철학이 영국을 지배하고 이것은 자연과학으로 연결되어 실험정신에 입각한 일군의 뛰어난 자연과학자를 배출한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기술발달로 이어져 18세기 후반 영국은 유럽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켜 명실상부한 1등 국가가 된.


이런 시기에 영국의 지성계를 주도한 사람들은 지적으로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인간이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했고 무엇이든 연구하면 세계와 우주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럼 어떤 지식을 연마하면 인간과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할 것인가.

 

우선 인간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학이 발전해야 한다. 다만 역사학을 문헌중심으로 하는 것으만은 부족하다. 인류역사에서 문헌으로 기록된 역사는 그렇지 않은 역사에 비해 훨씬 짧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 더 깊은 역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무엇일까? 바로 고고학이다. 고고학을 통해 땅 속으로 사라진 역사문명을 세상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곳의 땅을 파 유물을 발굴해 낼까? 우선적으론 문명발상지로 가는 수밖에 없다. 영국의 영향력이 점점 쎄어지자 그 틈을 타 학자들은 이집트로, 그리스로, 터키로, 메소포타미아로 달려갔다. 거기서 수많은 유물을 발굴해 런던으로 가지고 왔던 것이다.

 

 로제타스톤, 이것이 발견됨으로써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번방의 이것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4번방에서 볼 수 있다.


과거의 유믈이 있다고 해서 바로 그 역사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유물을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유물에 담겨 있는 그림과 글자를 해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유물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샹폴레옹과 같은 사람이 탄생한다. 언어학의 발달로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3천년, 4천년 아니 그 이전의 유물을 읽을 수 있다. 거의 2천 년 동안 무슨 뜻인지 몰랐던 이집트 상형문자, 메소포타미아 설형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주의 운동법칙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물리학이다. 뉴튼이 이것을 해냈다.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지구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말씀대로 단번에 만들어졌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믿을 수는 없다. 지구는 장구한 세월을 통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 답은 지질학을 연구하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지층을 연구하고 암석을 연구하면 지구의 지난 날 과거를 알 수 있다! 생명체의 과거는 어떤 모습이었고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 오늘에 이르렀을까. 암석에서 발견한 화석과 동식물을 세밀히 연구하면 그 비밀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18세기 계몽주의 하에서 영국과 유럽에선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던 것이다. 영국박물관은 바로 이런 계몽주의의 영향 하에 발달하게 된 각 학문의 연구 결과물을 일거에 볼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의 연구를 자극할 수 있는 곳이


영국박물관은 이런 의도를 박물관 초입에서 관람객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설명한다. 바로 제 1번방에서이다. 박물관에 들어가 과거 영국도서관이 있는 중앙 원통형 코트를 지나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1번방을 만난다. 여기가 바로 영국박물관의 설립의도를 알 수 있는 방이다.

 

1번방에선 자연사 관련 일부 수집품도 볼 수 있다. 위 사진은 암석과 패류 수집품, 영국박물관의 자연사 관련 수집품은 19세기 후반 자연사박물관을 따로 만들어 독립시켰다. 따라서 자연사 관련 수집품을 보고자 한다면 켄싱턴의 자연사박물관을 가는 게 좋다.


이곳에 들어가면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에 영국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연구하기 시작한 각종 결과물을 볼 수 있다. 고고학적 수집품인 이집트(상형문자가 새겨진 각종 수집품, 단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로제타스톤은 복제품임, 진품은 4번방에서 볼 수 있음), 그리스(도기류), 로마(조각), 메소포타미아(설형문자가 새겨진 수집), 페르시아 유물 등의 역사 유물과 지질학 및 동물학 등의 자료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서가에선 이들 연구결과를 책으로 편찬한 기록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영국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1번방을 통해 이 박물관의 대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연후 박물관 맵을 통해 관심 있는 방을 찾아 발길을 옮기면 된다. 아는 만큼 보일 것이고 보일 때마다 입에선 탄성이 나올 것이다.

(2016.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