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박물관

영국박물관 11(박물관2) 세계최초의 인권문서, 이란인의 긍지 키루스 실린더

박찬운 교수 2016. 8. 31. 14:39


영국이야기11(영국박물관이야기 2)


세계 최초의 인권문서, 이란인의 긍지 키루스 실린더


키루스 실린더


명색이 인권을 연구하는 사람이 영국박물관을 들락거리며 유물을 살피고 있으니, 이야기의 시작은 인권과 유관한 것부터 해보기로 하자. 

영국박물관 내의 이란 고대유물관(52번 방)을 들어가면 한 유리 상자에 글자가 조밀하게 새겨진 병모양의 실린더를 볼 수 있다. 워낙 볼 게 많은 방이라 관람객 대부분은 그저 스쳐지나가고 말지만 이 유물만큼 사연많은 유물도 없다. 

인권공부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이 유물을 세계 최초의 인권문서라 부른다. 바로 키루스 실린더다. 고대 아카디아 글자가 점토 위에 쓰여진 (길이 22.5 센티미터, 중앙 부분 직경 10센티미터의) 원통이다. 1879년 영국박물관의 메소포타미아 지역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고대 바빌로니아 유물로 1880년 이래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실린더를 이해하기 위해선 이란의 고대왕국 아케메네스 왕조를 알아야 한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 왕조 중 가장 중요한 왕조로 파르스 지역을 차지하였던 아리안 족 일파의 족장이었던 키루스(성경의 구약 에스라에 나오는 고레스 왕)에 의해 기원전 550년 세워졌다

키루스는 메데스 왕조의 수도였던 엑바타나를 식민지화하고 수사를 새 왕조의 수도로 정한다. 이어 그는 파사르가데를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만들고, 마침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최강자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멸망시켜 대제국을 만든다. 

키루스는 자신이 정복한 지역의 백성들에게도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취했다. 피정복지 백성을 잔인하게 죽이지 않았고 그들의 종교나 관습도 인정해 주었다. 바빌론에 붙들려 왔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국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 한다구약성경에 나오는 현명한 여인 에스더는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 못한 유대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그녀는 바사(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의 왕비가 된다이 이야기에 나오는 바사의 왕이 키루스 이후의 계승자인 다리우스 1세의 아들이자 다음 왕인 크세르크세스 1세를 말한다.

키루스의 이런 관용정책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키루스 실린더다이것은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하고 그 백성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약속한 일종의 평화문서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왕궁유적,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시 이 왕국은 불타 폐허가 되었다. 이 사진은 필자가 2008년 이란을 방문했을 때 현지에서 직접 찍은 것이다.


영국박물관에선 이 실린더의 글자를 자세히 분석해서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키루스는 만왕의 왕으로 칭송받을  자라는 것, 바빌론의 사람들은 전 왕(나보니두스)의 폭정에 시달렸다는 것,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해 신민을 그 폭정에서 구했다는 것, 그것은 바빌론의 신 마르둑의 선택이었다는 것, 키루스의 통치 하에 바빌론의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며 살 것이라는 것 등이다.

오늘 날 이 실린더를 세계 최초의 인권문서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키루스가 바빌론의 신인 마르둑을 존중했다는 것에서, 신앙의 자유나 사상의 자유와 통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페르세폴리스 유족 벽에 있는 조공행렬도, 2008년 필자 촬영


영국박물관에도 페르세폴리스의 조공행렬도 부조가 전시되어 있다. 위 부조는 52번 방 벽면에 있는 유물을 촬영한 것이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최전성기는 다리우스 1세 시절이다그는 제국의 또 다른 수도로 페르세폴리스를 정하고 이곳을 종교적 수도로 키운다이 당시 페르시아는 서쪽으로는 터키와 다뉴브강을아프리카는 이집트를 포함한 북부 아프리카 대부분을동으로는 파키스탄과 인디아에까지 뻗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아케메네스의 화려한 시절을 알 수 있는 한 증거가 페르세폴리스에 남아 있는 조공행렬도 부조다. 수많은 나라의 사신들이 왕중의 왕에게 조공을 드리기 위해 오고 있는 모습을 돌에 새긴 것이다. 

후대의 사가들은 이 시기를 제1차 통일 페르시아 제국이라 부른다이 시절 페르시아는 인류 최초의 대제국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로마제국이 전 지중해 지역을 호령하기 500 년 전의 일이다

대개의 나라들이 다 그렇지만 과거 선조의 영화를 현재의 정치에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란도 마찬가지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란 정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화려했던 과거를 국민들에게 자긍심의 원천으로 알리려는 제스추어를 취했다.

팔레비 왕 시절 이란은 이 키루스 실린더를 주목하고, 페르시아(이란)왕국 2500주년을 기념한다며 이것을 빌려 테헤란에서 전시한 적이 있었다그리고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혁명 정부도 다시 한 번 빌려 테헤란에서 전시하고자 했으나 그 뜻을 관철시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10년에야 이란 정부는 마침내 영국으로부터 이것을 빌려 오는 데 성공하여, 4개월간의 전시가 테헤란에서 이루어졌다. 이란에 가면 지금도 이 실린더를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전시가 끝나고 영국박물관이 선물한 레플리카다. 오리지널은 여전히 런던의 영국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다.

이 레플리카는 또 한 군데에서도 볼 수 있는데,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본부가 그곳이다. 그곳에도 국제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키루스 실린더가 전시되어 있다.

이만큼 이란인들에게 키루스 실린더는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을 제공하는 증거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해 본다. 이란이 팔레비 왕정 이후 지난 30년 이상 미국을 상대로, 아닌 전 세계를 상대로, 고립을 자초하면서까지 자신의 노선을 견지하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나는 그게 역사적 자긍심에서 기인한 이란인들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한다. 한 때 세계를 지배했던 영광스런 선조에 대한 기억이 강한 자존심을 만들었고,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우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낙쉐 로스탐 암굴묘에 새겨진 샤프르1세 앞에 얻드린 로마황제 발레리아누스. 2008년 필자 촬영


이란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란인들에게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사실은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서기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 로마황제 발레리아누스가 이란의 고대왕조 중 하나인 사산왕조의 사프르 1세에게 패하면서 포로가 된다. 그는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페르시아에서 치욕스런 삶을 살다가 죽었는데, 페르시아인들은 그 비참한 모습을 돌에 새겨 후대에 전했다. 페르세폴리스 근처 암굴 묘 낙셰 로스탐의 한 부조가 그것이다. 거기엔 발레리아누스가 말에 탄 샤프르 앞에서 엎드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2008년 나는 이 부조를 현장에서 직접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이란인들의 자존심이 무엇인지 그 일단을 읽을 수 있었다. 

(2016.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