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영국박물관

영국이야기10(박물관1)영국박물관 이야기 어떻게 할까

박찬운 교수 2016. 8. 31. 01:43

영국이야기 10(영국박물관 이야기 1)


영국박물관 이야기 어떻게 할까



영국박물관 전경


내 인생에 이런 기회가 생겼다

내 인생에서 이런 기회가 오다니! 런던에서의 생활, 이제껏 내게 이런 기회가 있을 줄 모르고 살아왔다. 대학에 있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호사다. 

한 학기 동안 주어진 연구활동을 어디서 보낼까 고민하다가 런던으로 정했다. 런던에서 보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선한 인연 덕에 런던대학(SOAS)에 올 수 있었다. 이 대학이 내게 좋은 것은 학교 자체도 맘에 들지만 대학건물이 바로 대영박물관 옆에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년 간 이 박물관에 몇 번 왔지만 소장품의 백분의 1 아니 천분의 1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올 때마다 아쉬움을 느꼈다. 언젠가 내게 시간과 돈이 있으면 이 박물관 근처에 집을 얻어 매일같이 출근하면서 이곳 소장품을 찬찬히 보고 싶다는 꿈까지 꾸었다.


런던대학 SOAS는 1916년 세워진 아시아 및 아프리카 지역연구대학이다.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 경영을 위해 인재양성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지역학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대학이 되었다. 


욱 이곳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버트런드 러셀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러셀은 대영박물관 근처에서 5년간 살면서 수시로 박물관을 왔다. 그런 연유인지 박물관 근처는 온통 러셀 이름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 박물관 앞 길은 Great Russell Street, 근처 공원은 Russell Square, 공원 내 카페는 Russell Cafe 그리고 러셀이 살았던 아파트는 Russell Chamber 등등(그런데 이것은 내가 잘못 알았던 것이었다. 런던에 와서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인데, 러셀에 살았던 Russell Chamber 외의 러셀이 들어가는 거리 이름이나 공원 이름은 버트런드 러셀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이 지역에 큰 땅을 가지고 있었던 베드포드 공작 러셀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런던대학(SOAS) 인근의 러셀 공원


영국박물관 근처의 러셀이 살았던 아파트 전경과 그가 살았던 34호 표시. 런던에 오자마자 러셀이 살았던 이 집을 찾아나섰다. 영국박물관 근처인 것은 알고 왔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와 백 미터 정도 걸으면 박물관 담장에 닿는다. 러셀은 이곳에서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살았다.


내가 이런 곳에서 반 년 가까이 보낸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다. 그래서 한국을 떠날 때부터 결심한 게 있다. 학교를 매일 출근하면서 내 전문분야인 법학관련 연구도 열심히 하지만 틈만 나면 대영박물관에 가서 소장품을 살피고, 또 주변의 러셀 자취를 찾아, 글을 쓰겠다고.

이제 런던에 온 지 한 달이 되어간다. 워밍 웝 시간도 지났다. 이미 나는 대영박물관을 3번이나 다녀왔고, 러셀의 흔적도 일부 찾아냈다. 이제부턴 그것들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글을 써나가야 할 시간이다. 


대영박물관, 아니 영국박물관

대영박물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대영박물관에 대해 물어보면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라고 답한다. 내가 다녀본 경험으로도 전 세계에서 두 개의 박물관만 꼽으라면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박물관의 이름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대영(大英) 박물관이라니, 제국주의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영국이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을 때는 자연스러웠겠지만, 지금이야 이 이름이 제격일 수 없다

그래서 혹자는 이 박물관의 영문명(British Museum) 그대로 영국박물관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나도 영국박물관이라 부르겠다.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로제타스톤. 이 유물로 인해서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해독되었다. 이것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집트 상형문자를 처음으로 해독한 샹폴레옹의 위대한 업적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로제타스톤에는 같은 내용의 글이 세 개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맨 위가 상형문자, 중간이 민용문자, 맨 아래가 희랍어이다. 사진상 중앙과 아래의 흰 부분은 촬영 당시 빛 반사로 생긴 것이다.


영국박물관의 시작은 대개의 서구 박물관처럼 누군가의 예술품 기증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중엽 한스 슬로언(Hans Sloan) 경이 평생 모은 컬렉션을 영국 정부에 모두 기증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박물관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영국 왕실의 컬렉션을 보태 1759년 영국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영국박물관이 세계 최고의 컬렉션을 갖게 된 것은 영국의 화려한 19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24시간 지지 않는 태양의 나라 빅토리아 왕조는 세계 각처에서 수많은 명품 유물을 거두어들여 영국박물관의 수장고를 채웠던 것이다.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빅토리아 여왕 집권 직전 나폴레옹을 격파하고 유럽의 패자가 된 영국은 나폴레옹이 이집트에서 가져온 로제타스톤을 가져갔고, 그리스 아테네 한가운데 있는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주요 부위를 떼어 이 또한 몽땅 가져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문화재 약탈이다. 이집트나 그리스는 이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국보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원통해 했겠는가. 이들은 수없이 문화재 반환을 요구했지만 영국이 귀를 기울일 리 만무했다.

 

영국박물관 내의 아시리아관 일부. 아시리아 니네베 궁전의 벽을 장식했던 부조가 아시리아관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이들 부조는 그 제작 연대가 기원전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데, 아시리아인들의 전투 장면이 주로 묘사되어 있다. 그중에서 관람객의 눈을 끄는 부조는 아슈르바니팔왕의 용맹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사자 사냥 중 한 마리의 사자가 척추에 화살을 맞고 죽음의 고통에 포효하는 장면을 묘사한 상처 입은 사자는 그중에서도 유명하다.


빅토리아 시대는 서구 박물관들에게 발굴의 시대였다. 주요 박물관들이 이집트로, 중동으로, 이집트로 달려가 고대 문명 유적지를 발굴하였다. 영국박물관은 여기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중동 대부분의 나라가 영국의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발굴권도 쉽게 땄고, 발굴품을 영국으로 가져오기도 쉬웠다. 지금 같아서야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영국박물관 내에 있는 이집트관이나 아시리아관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니 메소포타미아문명이든, 이집트문명이든, 그리스문명이든, 알짜배기 유물은 영국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게 되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영국이 주요 문명권의 최고 유물을 최고 수준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이 장물을 돌려주지 않고서도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이유다.


어떻게 쓸 것인가

나는 고고학자도 역사학자도 아니다. 그러니 내가 조금 아는 지식을 뻥튀겨 영국박물관의 소장유물을 학문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주제 넘은 일이다. 나는 내 식대로 영국박물관 이야기를 해나갈뿐이다, 

박물관의 수많은 소장품을 망나적으로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 눈에 들어온 소장품 중 뭔가 내 방식의 설명을 붙여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것들에 한해 조사를 바탕으로 설명할 것이다. 

자료를 참고하겠지만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내 상상력을 동원해 박물관 유물에 생명력을 부여할 것이다. 이 글이 부디 독자들에게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예술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길 기대한다.

(2016.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