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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물소리와 달빛 속에서 나를 찾다

박찬운 교수 2017. 8. 6. 19:37

오대산 물소리와 달빛 속에서 나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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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월정사

 

이번 방학 이런저런 회의에 불려 다니다 보니 먼 길을 떠날 수가 없다. 삼복더위와 번잡한 일에서 잠시라도 해방되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이 없다. 시간은 자꾸 가고... 며칠 후부터는 개학 준비도 해야 하는데... 아쉽기 그지없는 2017년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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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다행스럽게도 지난 며칠 서울을 떠나 있었다. 강원도 평창 오대산 월정사에서 며칠을 보내고 왔다. 생각해 보니 절만한 곳이 없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청정도량에 잠시라도 있다 보면 내 몸과 마음속에 붙어 있는 티끌과 먼지는 청류청풍에 깨끗이 씻겨 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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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초입의 오대산 계곡(상), 월정사 일주문을 통과한 뒤 절로 들어가는 전나무 길

 

내가 불자인가? 아무리 봐도 그렇지는 않다. 염불을 하는 것도, 불상 앞에서 절을 하는 것도, 불경을 읽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절에 가면 마음이 편해지니 어쩐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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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삼 십 수년이 흘렀다. 나는 절에서 고시공부를 했다. 대학시절 두 번 절에 들어가 한 번은 40일, 또 한 번은 90일을 공부했다. 그 덕에 고시에 합격해 법률가 생활을 해왔다. 절에서 공부할 때 아무 것도 모른채 불상 앞에서 절하며 소원을 빌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엔 달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산사 어느 곳을 찾아가 두 손 비비며 소원을 빌었다. 기복이라고 해도 좋다. 미신이라고 해도 좋다. 어머님이 장독대 앞에서 정한수 한 사발을 떠놓고 비는 그런 마음이었다. 살면서 그런 게 생각나는 모양이다. 마음과 몸이 바빠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땐 그 시절, 그 순간이 그립다. 그럴 때면 절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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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에서 몇 밤을 자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은 밤에도 열대야라는데, 오대산은 신기하게도 한밤 중 기온이 20도를 조금 넘을까, 창문을 열고 자면 한기를 느낄 정도다. 게다가 모기 한 마리 없다. 선선한 공기와 맑디맑은 물이 흐르는 오대산은 모기가 살 곳이 아닌 모양이다. 이런 피서지가 대한민국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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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적광전과 국보 48호 팔각구층석탑

 

월정사는 강원도를 대표하는 대찰이다. 7세기 중엽 자장대사에 의해 세워졌다니 1,4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20세기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쳐 오면서도 이 절이 이렇게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중생들로부터 존경받는 선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암과 탄허 두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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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1876-1951)은 우리나라 근현대 불교의 개창자로 불리는 경허 스님의 제자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고명한 승려다. 스님에 대한 유명한 일화는 내 중고등학교 시절 도덕 교과서(?)에까지 실리기도 했다. 한국 전쟁 때 스님이 상원사에서 계실 때인데, 하루는 국군이 들이닥쳐 상원사를 태우려고 했다. 이 때 스님은 가사를 갖춰 입고 군인들에게 절과 함께 자신도 태울 것을 요청했다. 이에 감복한 군인들이 상원사을 태우지 못하고 물러남으로써 절과 국보인 상원사 동종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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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었던 요사체(상)와 적광전에서 예불 드리는 모습(하)

 

탄허 스님(1913-1983)은 한암 스님의 제자로 내 대학시절까지 생존해 계셨다.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승이다. 대학 시절 티브이를 켜면 만물박사 한 분이 나왔는데, 바로 동국대 국문과 교수였던 양주동 박사였다. 동서양의 철학을 달변으로 전했던 분으로 자칭 대한민국 국보였다. 그 양주동 박사도 한 분 앞에선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는데, 그 분이 탄허 스님이다. 어린 시절 유교를 완벽하게 공부하고 출가한 덕에 한학에 탁월했으며 거기에 불경을 공부해 독보적인 불교학자가 되었다. 판만대장경을 비롯 수많은 불경 한역사업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스님은 천하의 명필로도 유명했다. 지금 월정사와 상원사에 가서 여러 전각을 둘러보다보면 비슷한 필체의 힘찬 글씨를 마주할 수 있다. 모두 탄허 스님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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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스님(상)과 탄허스님(하) 진영

 

탄허 스님의 글씨

 

나는 이 두 고승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월정사와 상원사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9킬로미터의 길은, 찻길 외에도 최근 선재길이란 이름으로 옛 길이 복원되어, 도보 여행자에게 인기가 높다. 나도 이곳을 따라 걸었다. 땀은 비 오듯 했지만 서울에서 흘리는 그런 땀이 아니다. 아무리 흘려도 냄새가 없다. 땀구멍에서 맑은 물이 흐를 뿐이다. 밖은 찌는 듯한 더위지만 오대산 밀림엔 해가 보이지 않는다. 계곡에선 힘차게 물이 내려오면서 곳곳에 선녀탕을 만들어 놓았다. 가끔 계곡물에 손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더위는 저 멀리 물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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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가는 선재길과 선재길에서 본 오대산 계곡

 

상원사... 맨 아래 사진은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

 

주지 스님인 정염 스님과 월정사 선원의 인월스님과도 좋은 인연을 맺었다. 정염 스님과는 월정사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한국불교의 과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도전적인 질문을 하자 스님이 답하셨다. 내가 고대한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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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한국 불교는 산 속에서 세상을 타자화하고 염불만 외우고 있습니다. 저에겐 지금 탈원전과 사드 철수가 중요합니다. 한국 불교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처사님 맞습니다. 불교는 생명을 존중합니다. 탈원전도 중요하고, 사드배치 철회도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체적인 보살행입니다. 그러나 영적 각성이 없는 한 삶의 현장에서 보살행을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불교는 그 보살행을 하게 하는 거대한 수원지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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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 스님은 하안거 해제를 이틀 앞둔 상황에서 두 번이나 귀한 시간을 내주셨다. 우리는 여러 시간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불교가 무엇인지, 승녀의 삶은 무엇인지, 수도자의 역할은 무엇인지... 그러다가 맨 마지막엔 나에 대한 귀한 조언도 아끼지 않으셨다.

“처사님은 기가 위로 올라와 있습니다. 분기를 잘 다스리는 게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 수양을 열심히 하십시오. 참선은 선방에서 앉아서만 하는 게 아닙니다. 걸으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뭐꼬?’ 라고 되내기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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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월정사에서 며칠을 보냈다. 요사체에서 홀로 누우면 창밖에서 달빛이 교교히 흘러들어왔다. 침실에 켜놓은 어떤 사치스런 조명이 저 달빛과 비교할 수 있을까? 계곡을 흐르는 물 소리는 밤새도록 자장가가 되어 주었다. 단 몇 시간을 자고 새벽 예불을 드렸지만 몸은 가뿐했다. 피서 중의 피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