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타클라마칸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실크로드 기행(7, 마지막 회)

박찬운 교수 2015. 9. 26. 19:53

타클라마칸 실크로드 기행(7, 마지막 회)

카슈가르를 밟고 파미르 카라쿨에서 포효하다


이제 여행 막바지다. 7일째 우리 일행은 아침밥을 챙겨먹고 여행의 종착지인 카슈가르로 향했다. 아침밥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생각난 게 있다. 이번 여행에서 아침밥을 먹는데, 시간 때문에 고생을 했다. 세계 어딜 가도 호텔 조식은 아침 7시 전후인데, 신장 지역은 8시 혹은 그 이후(우르무치나 쿠차는 8시, 호탄 이후부터는 8시 반)였다. 일행이 아침에 떠나기로 한 시간이 9시 이전이라 밥을 서둘러 먹어야 하는데도 이렇게 밥을 늦게 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은 시차 때문이었다. 중국은 알려진 바대로 전국 시간을 북경시간으로 통일해 쓰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북경(동경 126도)과 우르무치(동경 87도)는 2시간, 북경과 카슈가르(동경 75도)는 3시간 넘게 시차가 난다. 때문에 8시나 8시 반이라 하더라도 현지인들에게는 6시나 5시 반에 가까운 시간이라 사실 꽤 이른 시간이다. 이 때문에 외지인들이 이곳에 오면 시간문제로 불편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일행은 호탄을 떠나 엽성, 사차(야르칸트)를 거쳐 500킬로미터를 달려 저녁 무렵에서야 카슈가르에 도착했다. 카슈가르는 커스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타클라마칸 서쪽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다. 이곳은 실크로드에서 서역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곳으로, 파키스탄이나 인도 또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쪽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현장도, 혜초도 이곳을 통해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갔으며, 고선지가 서역정벌을 위해 파미르를 넘은 것도 이곳을 통해서였다.


19세기 후반이 되면 영국과 러시아는 이곳에 영사관을 개설한다. 이들 영사관은 순수한 영사기능보다는 정보수집이 주된 목적이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막기 위해 이곳에서 정보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현지 본부 격이 카슈가르 영국 영사관이었고, 러시아 또한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비슷한 목적으로 영사관을 이곳에 두고 있었다. 이들 영사관의 또 다른 목적은 자국 탐험대나 우호국 탐험대의 지원이었다. 타클라마칸을 돌아다니며 각종 유적을 발굴하던 서양탐험대는 이들 영사관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현지로 떠났던 것이다.


나는 이들 영사관의 흔적이 지금도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여행 정보지에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현지 가이드도 이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그런데 아주 우연하게도 이들 영사관 두 곳을 가볼 수 있었다. 영국 영사관은 바로 내가 이틀을 묵은 황가호텔의 뒤편에 보존되어 있었고, 러시아 영사관은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한 식당 구내에 보존되어 있었다. 지금은 모두 영사관이 아니고,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분명하게도 건물 주변에는 과거 이들 건물이 영사관으로 사용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식이 있었다.


일행과 함께 카슈가르 시내를 돌아보면서, 우선 향비묘당이라 불리는 아바 호자 묘당를 찾았다. 17세기 이곳 이슬람 지도자 아바 호자가 지은 것인데, 정작 유명한 것은 묘당 내에 모셔진 한 여인의 묘다. 묘의 주인공은 청의 건륭제의 비였던 향비다. 향비는 몸에서 향내가 났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재색을 겸비한 여인으로 18세기 말 청에 의해 이 지역이 정복된 후, 건륭제에게 바쳐졌다.


일설에 의하면 향비는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황제의 비로 간택되었지만 결코 건륭제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항상 몸에 칼을 차고 다니면서 정절을 지켰는데, 결국 황후에 의해 자결을 강요당했다(혹은 타살되었다는 말도 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런 향비를 지조를 지킨 여인으로 숭배하였고, 건륭제도 그녀의 장례를 성대히 치러주고, 그 시신을 베이징에서 3년에 걸쳐 이곳으로 운반하여 묘당에 안치토록 했다. 지금도 묘당에 들어가면 그 때 운구한 마차 일부를 볼 수 있다.


카슈가르는 신장의 이슬람 요람으로 불리는 만큼 가장 큰 모스크도 당연히 이곳에 있다. 시내 한 가운데 있는 에티칼 마스지드가 그 주인공이다. 1442년 이곳 지도자인 섹시 마르자가 공동묘지를 파헤치고 그 위에 세운 것인데 몇 번의 증축을 거쳐 오늘에 이른 것이다. 평일에는 2-3천명, 금요예배에는 6-7천명의 무슬림이 참석한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시내의 바자르도 볼만했다. 이곳 바자르는 신장 지역의 대표적인 변경무역의 장이다. 옛날 이곳 바자르는 중앙아시아나 저 동남아시아에서까지 온 상인과 물건으로 넘쳐 매우 번성했다. 최근에는 카람코람 하이웨이를 통해 파키스탄 상인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때가 마침 이른 시간이라 바자르의 활기찬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수 천 개의 점포가 들어선 바자르의 규모에서 수많은 상인과 고객이 왁자지껄하게 장을 보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제 여행 마지막 행선지, 카라쿨 호수를 이야기할 때다. 이 호수는 카슈가르에서 약 250킬로미터 떨어진 파미르 고원 내에 위치한다. 314번 국토를 타고 가는데, 이게 바로 파키스탄으로 연결되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로 이어진다.


카슈가르에서 거리는 그리 먼 것은 아니지만 이곳을 가는 길은 험로 중의 험로다. 내 이제까지 살면서 이렇게 험한 길은 처음이었다. 가이드가 서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당부를 몇 번이나 하는 바람에 아침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차에 올라탔다. 카슈가르를 벗어나 두어 시간 지나고부터 파미르 고원으로 올라가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왼쪽으로는 고산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계곡수의 물살이 예사롭지 않게 빨랐다. 조금 더 들어가니 고산은 모두 설산이다. 만년설이란 게 무언지 실감나는 순간이다.


산기슭 중국 공안 초소에서 엄격한 검사를 받고 차는 다시 산을 힘겹게 올라갔다. 나무 한그루 없는 산은 표면을 덮은 점토질이 빗물에 깎여 색색의 골짜기를 만들고 있다. 별천지다. 보기는 좋아도, 한 눈에, 지질은 위험하기 그지없다. 비라도 정상에서 퍼붓는다면, 그대로 산사태가 날 것 같다. 아닌 것도 아니라, 이런 일이 돌아오는 중에 일어났다. 빗방울이 차창을 때린다 했더니, 앞의 차들이 곧 모두 서버려, 더 이상 가지 않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전방 도로에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노면으로 흐르기 시작했는데, 산 위를 보니 토사가 밀려내려 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차들을 급히 후진시키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나는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여, 여차하면 하차할 생각으로, 황급히 배낭을 짊어졌다. 다행인지 우리 차는 안전한 후방으로 피신하여 3시간을 기다린 뒤 운행을 재개했다. 파미르 고원이란 게 이런 것이었다. 한 번 사나운 비가 내리치면 산 전체가 무너져버려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삼킬 태세였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이런 도로상황에서 무려 15시간을 차안에 있어야 했다. 단 한 시간의 카라쿨 호수의 절경을 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 길은 지금 중국 쪽에서 고속도로가 놓여지고 있다. 험준한 계곡 곳곳에 고가도로가 가설되고 있는데, 그 공사판을 보는 순간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중국 사람들 대단하다, 어떻게 해서 저런 난공사를 벌려가며 파미르를 넘으려고 하는지... 역시 만리장성을 쌓은 저력은 여전히 살아 있는 듯싶다.


이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이날 우리의 카라쿨 호수 여행은 대만족이었다. 해발 3600미터 산 위에 있는 카라쿨 호수와 인근의 백사호(인근 산이 하얀 모래산이라 그리 불리고 있음)의 전경은 이제껏 보지 못한 절경이다. 스위스에 가서 알프스의 고봉도 보았지만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모습이다. 7546미터의 무스타거봉이 버티고 있고 그 주변으로 5-6천미터의 고봉들이 호수를 바라보며 도열해 있다. 무슨 말로 이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가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요” 라는 말밖엔.


중국 땅 맨 서쪽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의 파란 하늘 밑에 설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 아래에선 호수가 빛난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현장이, 1300년 전 혜초가 이곳을 지났을 것이다. 거기에 대한민국에서 온 내가 서 있다. 갑자기 설산을 향해 포효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 여기 섰다! 나, 살아 있다!”


(끝)

후기: 이렇게 해서 타클라마칸 실크로드 기행기는 막을 내립니다. 제 여행이 이렇습니다. 좀 어렵지요? 하지만 이렇게 해야 저도 오래 동안 기억할 수 있기에 며칠 무리했습니다. 바라기는 페친분들 중에서 몇 분이라도, 불원간 저와 함께 여행하면서, 자연을, 세계를,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