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타클라마칸 실크로드

타클라마칸 실크로드 기행(4)

박찬운 교수 2015. 9. 26. 20:11

타클라마칸 실크로드 기행(4)

타클라마칸 불교 예술의 백미, 키질석굴에 서다


네 번째 실크로드 기행문을 쓰기에 앞서 몇 년 전 쓴 글이 생각나 그것을 옮겨본다.


“문명여행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 말한다면, 그것은 내게 사회적 행위로서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행 전후로 자료를 찾고, 여행 중에는 기록하고, 여행 후에는 정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습관은 사실 꽤나 피곤한 일이다. 나도 가끔은 그저 놀고 싶은 때가 많다. 그런데도 나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해왔다. 왜일까?


나로서는 이런 태도가 하나의 사회적 책무라 생각한다. 거창하게 이야기하면 맹자의 여민동락의 생활실천이다. 문명여행을 함에 있어 한국의 지식인이 감당해야 하는 하나의 책무는 이것을 그저 유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나누기 위한 놀이로 인식한다는 것이다.“(내 책, <문명과의 대화>,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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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4일째 드디어 이번 실크로드 기행의 백미가 눈앞에 펼쳐졌다. 쿠차에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키질석굴이다. 둔황 막고굴, 윈강석굴, 룽먼 석굴과 더불어 중국 4대 석굴 중 하나로 불리는 곳! 사실 나의 이번 실크로드 기행은 이 석굴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4년에 조성된 구마라습 동상


2010년 1차 실크로드 기행 중 나는 시안에서 우르무치를 행해 서진하면서 천수 맥적산 석굴, 란주 병령사 석굴, 둔황 유원석굴과 막고굴, 트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을 보았다. 모두가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실크로드 상에 있는 석굴이었다. 키질석굴은 바로 이들 석굴보다 더 서쪽에 있는 것으로 조성연대도 더 빠르고, 그 양식에서도 인도를 비롯해 페르시아 나아가 그리스 로마양식까지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 예술적 가치는 석굴 중 최고라고 하는 둔황 막고굴과 비견되거나,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도 한다.


키질석굴 전경, 저 산이 밍우타크산인데 2킬로미터 정도 쭉 늘어서 있다.


석굴에 도착하니 주변은 아무 것도 없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고비 한 가운데에 강 하나가 흐를 뿐이다. 이름하여 무자르트 강이다. 이 강은 수게트라 불리는 계곡 사이를 흐르는 데, 그 왼쪽을 보면 사암절벽이 있다. 밍우타크 산이다. 석굴은 바로 이 산에 마치 벌집처럼 조성되어 있다. 석굴과 강 사이에는 백양나무 숲이 있다. 키질석굴의 이런 모양새는 위에서 열거한 실크로드 상의 다른 석굴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이는 이 석굴이 실크로드 상에 조성된 다른 석굴들의 표준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키질석굴은 바로 저 암벽에 굴을 파 조성했다. 저런 굴이 3백여 개 뚫려 있는 것이다. 석굴 앞에는 1994년 조성된 구마라습 동상이 있다.


석굴관리사무소 정문을 통과하고 몇 걸음을 걸으니 검은 색 동상이 나타난다. 승려 한 사람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범상치 않다. 구마라습(구마라지바)의 동상이다. 쿠차와 키질석굴을 이야기하면서 이 사람을 말하지 않고 갈 순 없다. 중국 불교사, 그 중에서도 초기 불교사에서, 이 사람만큼 큰 공을 세운 이는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중국 대승불교에서 딱 두 사람만 들라하면, 단연코 현장과 함께 구마라습이다. 이 사람을 빼고 중국 불교사를 말한다면 한마디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일설에 의하면 구마라습은 구자국의 공주와 인도의 귀족 사이에서 난 인물로 어린 시절 출가해 인도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4세기 말 중국 본토가 전진에서 후진으로 왕조가 교체될 때 장안으로 와 대규모 역경사업을 벌렸다. 장안 생활 10년 동안 그는 수 천 명의 승려를 동원하여 반야심경, 법화경, 금강경 등 35종 294권을 번역함으로써 중국 대승불교의 초석을 쌓았다.


키질석굴에서 반대편을 찍었다. 무자르트 강까지 백양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고 강 건너 츠르타크 산이 병풍처럼 서 있다.



따지고 보면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도 바로 구마라습의 작품이다. 그뿐인가. ‘극락’이란 말도 바로 그가 불경을 번역하면서 만들어낸 말이다. 이런 이유로 그의 고향 구차 키질석굴에 그의 동상이 조성된 것이다. 조성된 해가 1994년이니 구마라습 탄생 1650년을 기념한 것이리라.


지금까지 키질석굴에서 발견된 이 석굴 수는 236개이지만 앞으로 그 수는 더 늘어날 수 있다.하지만 이들 석굴 중 제대로 된 벽화가 남아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벽화는 타클라마칸 전 지역이 이슬람화하면서 많이 망가졌고 더욱 20세기 초 서구탐험대에 의해 상당량이 도굴되었다. 그 탐험대 중 하나가 르콕이 지휘한 독일탐험대였다.




르콕은 이곳과 트루판 베제클리크 석굴의 벽화를 뜯어간 사람으로 유명한데, 르콕 탐험대는 다른 나라 탐험대와 달리 특수용액을 사용해 벽화를 통째로 뜯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르콕은 키질석굴에서 예술적으로 가장 훌륭한 벽화만을 선별해 완벽하게 떼 낸 후, 우르무치를 경유해 러시아로 넘어간 다음, 그곳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 약탈품을 모두 베를린으로 옮겼다.


하지만 옮겨진 벽화 중 상당수는 2차 대전 중 소실되는 불운을 당했다. 베를린박물관에 보관된 르콕의 약탈물은 연합국의 공습이 있을 때 안전한 장소로 옮겨지지 못했다. 실제모습에 가까운 상태로 전시하기 위해 박물관 벽에 벽화를 직접 부착했기 때문에 공습 시 바로 떼어 내 수장고로 옮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르콕이 가져온 약탈품 60%는 살아남아 지금 베를린인도박물관에 가면 그것들을 볼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이 서양탐험대에 의해 석굴벽화가 약탈된 게 억울했든지 요즘 이들 석굴에 가면 보안이 너무 심해 석굴 내에서 사진 한 장도 찍질 못한다. 사진을 찍는다고 석굴에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닐 텐데, 무조건 안 된다고 한다. 중국 정부적 차원에서 보호되는 석굴들을 들어갈 때는 통상 카메라를 관리사무소에 보관해야 한다. 그런 연유로 이번 여행에서 나는 석굴 내부 사진을 찍질 못했다. 여행 내내 아쉬웠다.


우리 일행은 10호굴과 17호굴을 비롯해 6개굴을 돌아보았다. 굴은 3세기부터 9세기까지 약 600년 동안 조성되었기 때문에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조성 양식이 다른 게 많다. 대표적으로 굴 천정을 보면, 어떤 굴은 장방형의 평평한 상태에 마름모꼴의 격자가 그려져 있고 그 속에 석가모니의 생전 설화를 그려 넣은 쿠차 특유의 방식인가 하면, 또 다른 것은 아치식 천정으로 서구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의 그것과 유사하다.


우리가 주목한 굴은 역시 10호굴이었다. 이 방에는 한 조선인의 넋이 잠들어 있다. 그 이름 한락연. 그는 조선족 화가로서 1940년대 이곳에 와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석굴을 안스러워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남아 있는 석굴벽화를 모사하고 그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10호굴에는 그의 생애를 기리기 위해 사진 한 장과 그가 이 석굴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그 사정을 알려주는 글이 한 쪽 벽면에 새겨져 있다. 그는 글 마지막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석굴을 특별히 애호하고 보존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일행 모두 숙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프닝 하나를 이야기해야겠다. 우리 일행 중 70이 넘은 노인 한 분이 계셨다. 이 분에겐 이번이 3번째 타클라마칸 여행이었다. “선생님, 어떻게 해서 남들 한 번 오기도 어려운 타클라마칸에 세 번씩이나 오셨습니까?”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딱 한 가지 이유입니다. 바로 키질석굴 10호굴에 있는 한락연 선생의 글씨를 찍기 위해 온 거에요. 지난번에도 그것을 찍으려 했지만 관리원이 찍지 못하게 해서 못 찍었거든. 이번만큼은 꼭 찍어가야 하는데...”


나는 내심 이 분이 어떤 방법으로라도 한락연 선생의 글씨를 찍어 가길 바랐다. 하지만... 체면불구하고 석굴을 안내하는 여성 관리원에게 손짓 발짓 다써가며 갖은 사정을 다했지만 결과는 허사였다. 석굴을 나오면서 허탈해 하는 그분을 보니 내가 괜히 화가 났다.


“아니, 서양탐험대가 그렇게도 많이 약탈을 해 갔는데, 석굴보존에 힘쓴 조선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이 석굴에서, 한국 사람이 사진 한 장 찍겠다는 것을, 그걸 못하게 막아. 몇 백 년 된 벽화를 찍는 것도 아닌데... 에잇! 야! 그렇게 보호할 것 같으면, 왜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냐. 에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