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인생/안데스에 서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4)-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

박찬운 교수 2024. 1. 17. 13:19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4)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

 

삭사이와망에서 바라 본 쿠스코

 
우리 여정의 3번째 목적지는 쿠스코(Cusco 혹은 Cuzco). 리마에서 항공편으로 쿠스코에 도착하니 이른 오후다. 다음 날 마추픽추를 향해 출발하기 때문에 잠시 쉬어야 하지만 나로선 오후 시간을 그냥 허비할 수 없다. 호텔 체크인을 하자마자 바로 숙소 근처 아르마스 광장(쿠스코 광장)으로 나갔다. 고색창연한 광장 한 가운데에 서서 대성당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바로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라는 말인가! 해발 고도 3,400미터 안데스의 분지에 수 세기를 거쳐온 붉은 지붕의 스페인식 건물들이 빼곱하게 들어서 있는 이곳이  티브이 여행 프로그램에서 수없이 보아 온 '세상의 중심', 쿠스코이다.

 

삭사이와망에서 쿠스코를 배경으로 한 컷!

 

페루에서 쿠스코의 지위는 특별하다. 수도가 아니면서도 헌법에 그 특별한 지위가 규정되어 있을 정도니 말이다. 페루 헌법은 페루의 수도는 리마이지만 역사적 수도(historical capital)는 쿠스코라고 규정(제49조)하고 있다.

세계의 주요 도시를 가면 거기가 수도는 아니지만 경제적 수도라느니 문화적 수도라느니 혹은 역사적 수도라느니 하며 부르는 예가 있지만(예컨대 모로코에서는 법적 수도는 라바트지만 역사·문화적 수도는 마라케시라고 함) 역사적 수도라는 칭호를 붙이고 그것을 국가 최고법인 헌법에 명시한 예가 페루 외에 어느 나라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쿠스코는 페루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정면에 쿠스코 대성당이 보인다.

 

아르마스 광장 한 가운데에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잉카제국의 최고 영웅 파차쿠티다.

 
원주민어인 케추아로 ‘세상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갖는 쿠스코는 13세기 경부터 쿠스코 왕국의 수도로 기능하다가 15세기 말 왕국이 도시국가를 넘어 남미 최대의 제국, 곧 잉카제국으로 발전했을 때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런 제국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쿠스코 왕국의 9번째 잉카(잉카는 원래 왕을 의미하는 호칭임)이자 잉카제국의 초대 잉카 파차쿠티(1438-1471). 그는 30여 년이 넘는 제위기간 중 도시 국가에 불과한 쿠스코 왕국을 인구가 천만이 넘고 영역은 남북 수 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안데스의 대제국(이 제국은 현재의 에쿠아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의 일부를 포함)으로 변모시켰다.

학자들은 마추픽추도 파차쿠티 제위기간 중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니 우리가 아는 잉카제국은 모두 이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세계 여행자들의 여행 성지인 쿠스코의 심장 아르마스 광장 한 가운데를 빛내는 동상의 주인공은 파차쿠티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제국이 한줌도 안 되는 스페인 정복자들(conquistadors)의 손에 넘어갔다는 말인가. 그러나 역사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지휘하는 200명도 안 되는 소수의 스페인 병사들에 의해 잉카제국은 허망하게 멸망되었음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제러드 다이어몬드는 그의 저서 <총균쇠>에서 이런 정복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유럽의 발전된 기술(총과 쇠)과 신대륙의 원주민에겐 속수 무책의 전염병(균)에 기인한 것이라고 쓴 바 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씁쓸하기 그지 없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당시 잉카였던 알타울파나 잉카인들은 피사로를 비롯한 스페인 병사들을 정복자가 아닌 신적 존재로 여겼을 것이라는 말도 충분히 일리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이들이 타 문명에서 온 정복자로 알았다면 죽기 살기로 싸웠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렇게 쉽게 스페인이 잉카제국을 무너트리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쿠스코 대성당(위키피아), 겉 모습은 고딕-르네상스이며, 내부의 제단 등은 바로크 양식이다.

 
나는 쿠스코에 오기 전에 짧은 시간이더라도 꼭 봐야 할 곳 몇 군데를 찍어 놓았다. 첫 번째가 아르마스 광장의 대성당. 이 성당은 원래 식민지 초기 쿠스코 왕조의 사파 잉카(사파 잉카라는 말은 '유일한 잉카'라는 뜻임) 비라코차의 궁전을 허물고 지어졌는데, 1650년 대지진 전후로 100 여 년 간의 공사 끝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된 것이다. 현재는 성당이자 하나의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어 들어가기 위해선 입장료를 내야 한다.

이 성당에서 반드시 봐야 할 것 하나가 <최후의 만찬> 그림이다. 그것은 식민지 서양 미술인 쿠스코 유파(Cusco school)가 만들어 낸 매우 독특한 그림으로서 식민지 시대 이곳의 화풍과 토착화되어 가는 기독교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나는 내부를 돌아보며 이 그림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는데(마침 어떤 페루인 가이드가 외국인 여행자를 위해 영어로 안내를 하고 있어 귀동냥을 할 수 있었음), 자세히 살펴 본바, 그 독특함은 금방 손에 잡혔다.
 

애석하게도 대성당 안에서는 사진 촬영을 금해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이 사진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구한 쿠스코 대성당에 걸려 있는 <최후의 만찬>(퍼블릭 도메인)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이 그림은 쿠스코 태생의 화가 마르코스 사파타의 1753년 작품으로 통상의 ‘최후의 만찬’ 과는 일견 색조가 다르지만(예컨대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밝고 화사하나 이것은 음울하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식탁 위의 음식과 술의 차이이다. 예수와 12 제자가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게 아니고 안데스의 전통음식인 기니아 피그와 전통음료인 치차를 마시고 있다.

이런 그림이 어떻게 가능할까? 성경에 이런 내용이 전혀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 아닌가. 더군다나 18세기라면 쿠스코든 어디든 스페인이 통치하는 곳이라면 종교재판소가 권력을 휘두르던 시기인데, 이런 그림이 무사 통과되어 성당 벽을 장식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추측컨대, 스페인 식민통치자들이 이런 정도는 눈 감아 줌으로써 기독교의 현지화를 도모하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마치 우리나라 절에 산신령을 모시는 삼성각을 두고 있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기술을 잘 알 수 있는 쿠스코 시내의 골목길(위). 여기에 잉카인들이 만든 12각돌(아래 사진 중앙 하단)이 있다.

 
내가 쿠스코에서 두 번째로 봐야 할 곳은 쿠스코 골목길에 있는 12각돌. 잉카인은 돌을 다루는 솜씨가 비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돌을 마음대로 깎아 궁전과 신전을 만들었다. 그것도 가장 다루기 힘든 돌 중 하나인 화강암을 말이다.

12각돌은 잉카인들이 쌓아 올린 석축 중에 12 개의 각이 있는 돌을 말한다. 12각돌은 대성당에서 불과 2백 미터 거리도 되지 않은 골목길에 있었다. 사람들이 어느 석벽 앞에 모여서 사진을 찍기에 직감적으로 저기가 12각돌일 것이라 생각하고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그렇다고 한다. 그는 12각돌을 찾는 나에게 정확하게 그 돌까지 가르켜 주었다. 12개 각이 진짜인지 일일이 확인해 보니 과연 그렇다.

잉카인들이 만든 석축은 머리카락 한 개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은 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그동안 여러 번의 강진에도 끄덕하지 않고 살아 남았다. 이 석벽은 식민지 시절 스페인식 건물(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됨)이 들어설 때 뜯기지 않고 주춧돌이 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쿠스코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삭사이와망이 있다. 이곳에 오면 잉카제국 시절 잉카인들이 얼마나 돌을 잘 다루었는지 리얼하게 알 수 있다.

 
잉카인의 석축 기술은 쿠스코 골목에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몇 곳에서 더 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쿠스코 시내를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삭사이와망 (Saqsaywaman) 이다. 이곳은 쿠수코 도착 다음 날 성스러운 계곡에 가기 전에 들렀는데, 잉카제국 시절엔 태양신전이었고, 식민지 시대는 요새였다는 곳이다.

삭사이와망에 도착해 아직도 상당한 정도로 남아 있는 석축들을 보면서 잉카인들의 뛰어난 기술에 감탄했다. 선진문명과의 교류가 없어도 인간이 모여 국가 체제를 이루면 자연스럽게 이 정도의 기술을 낳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이들보다 3천 년 이상 앞서서 화강암을 자유자재로 잘라내 오벨리스크를 만든 고대 이집트인들이 있지 않은가.
 

잉카제국 시절 태양신 인티를 모신 코리칸차가 있었던 곳에 만들어진 산토 도밍고 성당

 
쿠스코 내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봐야 할 곳은 산토 도밍고 성당. 이 성당은 잉카제국 시절 잉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전(태양신 Inti를 모신 곳)인 코리칸차 위에 만들어졌다.

식민지 시절 지배자들은 신전을 없애고 잉카인들이 만든 튼튼한 석축 위에 수도원 성당을 만들었다. 지금도 외관으로 잉카인의 석축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잉카신전이 기독교 성당과 묘한 동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내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나는 대성당 들어갈 때 이곳을 포함한 패키지 티켓(50 페소)을 샀기 때문에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성당은 스페인 풍의 넓은 중정을 가진 건물로 지금은 성당 용도보다는 주로 미술관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안내 책자에 의하면 이곳에는 쿠스코 화풍의 많은 회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희망의 땅 안데스에 서다 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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