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의 힘은 세다 — 광화문 광장을 온라인으로 옮기며
(이글은 지난 15년 간의 나의 사회참여에 관한 고백록이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
나도 가끔 광장에 나간다. 촛불이 타오르던 밤, 함성이 광화문을 가득 채우던 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광장에서의 나는 수많은 얼굴 가운데 하나로 잠시 자리를 함께 했을 뿐이었다.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자리는 따로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고, 자판 위에 손을 올린다. 그 자리가 내 자리다.
거리의 외침이 순간이라면, 이곳의 싸움은 오래 남는다. 더 집요하게, 더 끈질기게 이어지는 싸움. 결국 나는 그 자리로 돌아온다.
40년의 이력, 하나의 길
돌이켜보면 나의 지난 40여 년은 세 개의 얼굴로 이어져 있다.
처음은 변호사였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법정에 섰던 그날 이후, 나는 법이 사람을 위해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지를 몸으로 배웠다. 크게 내세울 일은 아니지만, 나는 적지 않은 시간 약자의 편에 서 있었다. 제도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곁에서 싸웠다.
그 다음은 인권 실무 공직자였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책을 만들고, 권리를 구제하는 일을 맡았다. 현장이 아니라 제도 안에서 인권을 다루는 자리였다. 그 5년 남짓의 시간 동안, 법과 제도가 어떻게 서로를 떠받치고 또 어떻게 서로를 무너뜨리는지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법학교수다. 2006년 대학으로 옮긴 이후, 강의실에서 인권법을 가르쳐 왔다. 교수라는 자리는 현실로부터 한 발 물러서는 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리, 더 멀리까지 목소리를 보낼 수 있는 자리였다.
변호사로, 인권 공직자로, 법학교수로, 얼굴은 셋이었지만 질문은 동일했다. 이 나라에서 법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인권은 실제로 보호되고 있는가. 나는 그 질문을 내려놓지 않으려 애썼다.
왜 쓰기 시작했는가
2010년 전후(박근혜 정권)의 일이다. 대학으로 옮긴 지 몇 년이 지나, 강의와 연구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그때 문득 어떤 불편함이 나를 붙잡았다.
세상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고 있었다. 법을 아는 사람이, 인권을 연구한 사람이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서 침묵하는 것. 그것이 과연 옳은가.
결국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SNS에 짧은 글을 올렸고, 이어 블로그를 열었다. 이름은 ‘아브라카다브라’. “말이 이루어진다”는 오래된 주문. 허세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그렇게 붙였다. 그 말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 하나로.
자판 위의 싸움
처음엔 망설이기도 했다. 교수가, 법률가가, 이렇게까지 드러내도 되는가. 조금은 점잖게, 조금은 절제된 언어로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곧 깨달았다. 그 점잖음이야말로 오래된 침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그 침묵이 얼마나 많은 불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는지를.
그날 이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권력을 비판했고, 부당함에 분노했다. 어떤 날은 밤을 새웠고, 어떤 날은 전철 안에서 글을 썼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언론에 150여 편, SNS에 2800여 편, 블로그에 1200편. 그중 500편이 넘는 글이 ‘나의 주장’이라는 이름으로 블로그에 남겨져 있다. 사법, 인권, 정치, 검찰개혁, 내란 사태, 그리고 AI와 인간. 시대가 던지는 질문을 나는 피해가지 않으려 했다.
누군가는 나를 ‘키보드 워리어’라 불렀다. 나는 그 말이 싫지 않다. 전사는 무기를 가리지 않는다. 광장에서의 외침도 싸움이고, 자판 위의 문장도 싸움이다. 나는 단지 이 자리에서 싸워왔을 뿐이다.
법을 아는 자의 책임
나는 평생 법을 공부한 사람이다. 나는 그 지식을 무기로 공론장에서 글을 써왔다.
무죄추정 원칙을 내세워 내란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럴듯한 논리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 앞에서 멈췄다. 나는 이렇게 썼다. 살인을 눈앞에서 본 증인에게 무죄추정을 이유로 입을 다물라 할 수는 없다. 내란을 목격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법의 언어로 싸우는 자들에게는 그 언어를 더 정확히, 더 정직하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강한 반격이다.
그러나 나는 늘 경계했다. 법을 아는 자의 언어가 시민과의 거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렇게 쓴다. “이 이야기는 순전히 비법률가를 위한 것입니다.” 전문가의 언어를 시민의 언어로 옮기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그날 밤을 나는 잊지 못한다. 비상계엄 선포. 국회로 향하는 군인들.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이 나라에서,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거의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내란의 법리를 쓰고, 탄핵 절차를 분석하고, 비정상의 재판을 비판하고, 제도의 균열을 짚었다. 70편이 넘는 글이 블로그에 쌓였다.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이 옅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기억전쟁’에 대해 썼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멈출 수 없었던 이유였다.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나는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법조계에 있지만 법조 기득권을 비판한다. 진보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틀리면 말한다. 그래서 종종 양쪽에서 동시에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진영이 아니라 법치의 논리로 사고하는 것. 그것이 내가 끝까지 지켜야 할 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은 글쓰기에 정치적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고 싶지는 않다. 정치적이되 독립적인 글쓰기. 세상을 향하되, 어느 편의 나팔수가 되지 않는 글쓰기. 나는 지난 15년 동안 그 경계 위에 서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
나는 거창한 것을 바라지 않는다. 법이 법답게 작동하는 나라. 검찰이 권력의 도구가 아닌 정상적인 법집행기관으로 존재하는 나라. 판사가 눈치를 보지 않고 증거와 법리로 판단하는 나라. 억울한 사람이 법 앞에 설 수 있는 나라. 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우리는 이미 한 걸음 나아왔다.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고 내란 법정에 세운 나라다. 그러나 한 번의 사건이 나라를 바꾸지는 않는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 집행하는 사람들, 해석하는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법치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나는 오늘도 자판을 두드린다. 말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으면서. 15년 전, 처음 글을 올리던 그날의 마음으로.
아브라카다브라!
(2026.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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