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기억하는 만큼 존재한다, <내일의 기억>

박찬운 교수 2021. 1. 30. 06:01

 

 

 

내가 어느 날부터 기억력을 상실한다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오래 전 일을 기억 못하는 것이야 누구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자기 집을 찾아오지 못하고, 가족의 이름과 심지어 얼굴마저 잊어버린다면.... 마지막으론 나 자신조차 누구인지를 모른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과연 살 필요가 있을까? 아니 이런 고민마저도 할 수 없을 텐 데....

사람은 기억하는 한도에서 살아가는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내가 더 이상 너를 모르는데 너란 사람을 어찌 사랑할까? 내게서 기억력을 앗아가면 너는 존재하지 않고, 급기야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내가 기억하는 만큼 존재하는 것이다.

 

뭔가 불길한 예감을 갖고 병원을 찾은 사에키와 미에코

 

일본 영화 <내일의 기억>(츠츠미 유키히코 감독의 2007년 작)은 기억력을 잃어가는 한 인간의 삶을 실감나게 그렸다. 사에키 마사유키(와타나베 켄)는 능력 있는 회사원이자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아직 50이 안 된 이 사람에게 이상한 일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다.

광고회사의 부장으로 대박 수주를 성공시켜 회사 내의 최고의 기대주로 찬사를 받는 가운데, 어쩐 일인지 사람을 자주 까먹고 중요한 회의마저 잊는다. 몇 번이나 갔던 고객사의 위치를 몰라 거리를 헤맨다. 집으로 돌아 갈 때 매일같이 똑 같은 물건을 사면서도 항상 처음 사는 것으로 안다.

 

의사로부터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 사에키

 

아내 미에코(히구치 가나코)는 남편의 상태에서 이상함을 감지한다. 불길한 예감을 갖고 남편을 병원으로 데려가 진찰을 받게 한다. 불길한 예감은 벗어나는 법이 없는 게 우리의 인생. 알츠하이머!

MRI 사진을 보니 남편의 대뇌 한 가운데가 까만색으로 변해 있다.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에 섬유농축체가 가득 고인 것이다. 순간 사에키는 현실을 부인하며 초짜 의사가 사람 잡는다고 소리를 친다.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회사 생활 26년, 천신만고 끝에 최고의 성과를 내고 있는데... 이제 몇 달이 있으면 딸 에리가 결혼을 하고 손주를 보게 되는데...

그러나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가까스로 사에키는 퇴사 전 딸 에리의 결혼에 참석한다. 이 날 가지고 간 원고를 잊어버려 어렵게 가족대표 인사를 한다.

 

결혼식장. 많은 하객 속에서 사에키는 어쩐지 우울하고 불안하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순간 가족을 대표해 하객들에게 인사를 할 시간. 며칠 동안 정성스럽게 써 놓은 원고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바로 직전 사에키는 화장실에 들렀다가 원고를 세면기 옆에 두고 나옴)

갑자기 머리는 하야진다.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 사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에미코가 옆에서 귀속 말로 ‘나오야’를 불러준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천금의 무게 같다. 짧은 인사를 끝내자 하객들 사이에선 ‘축하해요’ ‘힘내요’라는 말이 쏟아진다.

 

병세가 악화되자 퇴사를 결심한 사에키, 퇴사하는 날 부하직원들이 나와 배웅한다.

 

사에키는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다. 딸 결혼식까진 현직에 있었으니 그것으로 할 일은 다했다. 회사를 나오는 날 26년 간 다닌 회사가 낯설다. 만나는 사람도 낯설고...언제 내가 이 회사를 다녔단 말인가.

회사 현관문을 밀치고 나올 때 후배 직원들이 달려와 퇴사를 아쉬워하고 건강을 빈다. 그리고 각자 사진에 이름을 써서 선물로 준다. 제 이름을 잊지 말아주세요‘ 평상시라면 권위 있는 부장으로 보스답게 한마디 했겠지만 어제의 사에키가 아니다. 그는 부하 직원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한다.

 

치매에 도움이 되는지 사에키는 도예를 배운다. 자신이 만든 찻잔에 아내 이름 미에코를 새겨 넣는다.

 

영화의 마지막은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다. 발병 3년이 되니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현대의학은 이 병의 진행 속도를 조금 관리할 뿐 원상으로 돌아오게 하진 못한다.

사랑하는 아내 에미코를 잊지 않기 위해 도예를 배우며 찻잔에 그녀의 이름을 새긴다. 그것을 가지고 옛날 아내를 만나 프러포즈를 하던 산 속 가마를 찾는다. 거기서 도예선생을 만나 하룻밤을 지내며 아내 이름을 새긴 찻잔 하나를 굽는다. 하산 하는 길... 멀리서 한 여인이 산속으로 올라온다. 미에코.

사에키는 그녀를 보고도 그냥 스쳐지나간다. 과거 젊은 시절 사에키를 만날 때 미에코는 자신의 이름이, 나무에 열매를 맺는 의미라고 말했고 오늘 똑 같이 말하지만, 사에키는 그녀를 처음 만난 듯 좋은 이름이라고만 말한다.

 

아내의 이름을 새겨 넣은 찻잔을 가마에서 구워서 산을 내려 오는데 아내 미에코를 만났다. 하지만 사에키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아렸다. 어쩜 사에키의 모습이 내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도 났다. 영화중에서 의사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내리기 위해 단어 3개를 제시하고 잠시 뒤에 그 단어를 물어본다. 벛꽃, 기차, 고양이. 단기기억력을 테스트하는 것인데...나도 순간 기차밖엔 생각이 안 났다.(영화를 보면서 진땀이 난 부분)

영화를 보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그 장면을 떠올렸다. 무슨 단어더라... 머리를 쥐어짰다. 마침내 세 단어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오늘 이 글은 자료나 타인의 리뷰를 참고하지 않고 오로지 내 기억만으로 쓰는 것이다(감독과 배우 이름만 인터넷으로 검색했음).


내가 요즘 기억력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하는 일 자체가 기억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수십 개의 보고서를 읽고 판단을 한다. 열 개의 사건보고서를 읽으면 두어 개는 유사하다. 그 유사성이 무엇일까. 옛날 같으면 그것을 단 몇 초 내에 알아냈을 것이다. 지금은 확연히 속도가 늦어졌다. 보고서를 출력해서 서로 비교해 보아야 그때서야 뭔가 잡힌다. 수 십여 건의 사건을 처리하고 방으로 돌아와 긴장을 풀면 삽시간에 내 뇌 속의 기억이 비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하루의 일을 기록하고, 일어난 일 중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자세히 기록해 둔다. 인권위에서 보낸 1년 만에 그 기록량이 무려 250쪽을 넘는다. 200자 원고지로 1,200 장 이상 분량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오늘도 나는 기록한다.



나이 60이 되니 이런 영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늙는다는 게 단지 숫자가 늘어나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젊은 날 좋은 기억력을 자랑하며 주어진 일을 자신 있게 해냈다. 그게 축복이었다.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가족과 여행을 떠나고... 당시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니, 축복이었다.

어제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함께 경험했던 것을 기억한다는 것... 그게 축복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사랑하는 가족, 형제, 친구... 그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일들... 머릿속에서 하나하나 떠오를 때마다, 신은 나를 아직도 축복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이 축복의 시간이 조금 더 가길 두 손 모아 빌어본다.



아, 그런데 왜 영화 제목이 ‘내일의 기억’일까? 내일이란 상상의 대상이지 기억의 대상이 아닌데...우리 모두에게 다가 올 내일, 그것을 기억하자는 의미인가? 영화의 이야기가 누구의 내일도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일까? 아마...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