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own 중간 감상기(시즌1, 2)

 

 

 

 

왕가의 사진(마가렛 공주, 여왕부처, 여왕의 할머니인 조지5세 왕비, 여왕의 어머니인 조지6세 왕비)

 

 

오랜만에 큰 맘 먹고 한 시리즈물을 보고 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The Crown. 현대 영국왕실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1회 1 시간씩 10부작의 한 시즌이 끝나면 다시 같은 분량의 다음 시즌으로 이어진다. 넷플릭스엔 시즌4까지 나왔으니 총 40부작(현재 시즌6까지 제작). 전체를 감상하려면 40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오늘로서 시즌 2까지 감상을 완료했다. 곧 바로 시즌3와 시즌4를 볼까하다가 무리한 시청이란 생각에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이제까지의 감상을 정리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영국왕실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주로 가십거리를 말하지만...가끔은 진짜 저 왕실의 속살을 알고 싶어 한다. 이것은 21세기에도 군주가 존재하는 나라에 대한 당연한 호기심이다.

영국은 어떻게 지난 2백년 격동의 유럽역사에서도 입헌군주제를 확립할 수 있었을까? 이 시대에서 영국의 왕은 국민들 사이에서 어떤 존재일까? 영국의 군주제란 버킹검 궁전 밖에서 하루에 한 번 근위병 교대식을 보면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왕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화려한 궁전에서 사는 왕족은 일반 시민들과 어느 정도의 괴리가 있는 것일까? 그들도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느끼면서 행복을 쫒는 사람들일까?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보낼까? 모든 것이 정략적일까?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떻게 사랑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것일까?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기서 군림이란 무엇일까? 그저 보통사람들과 다른 권위만 보여주면 왕의 역할은 끝나는 것일까? 내각과 왕은 어떤 관계를 맺어가면서 영국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것일까?

이 드라마를 보겠다고 결심하기 전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40시간을 투자한다는 것은 나로선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부군 필립공

 

역사물이 다 그런 것이지만 이 드라마를 볼 때도 한 가지는 명심해야 한다. 이 드라마의 모든 내용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현재의 영국왕실을 배경으로 한데다 촬영 또한 상당부분을 런던에 소재하는 궁전에서 했으니 사실성은 어떤 역사 드라마보다 도드라진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허구는 분명 이 드라마 속에도 혼재한다. 그것을 다 가르면서 보기란 영국현대사를 전공하지 않고선 어렵겠지만, 중간 중간 의문은 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자칫 이 드라마를 보고 영국왕실의 진실을 알았다고 지적 만용을 부리기 알맞다.  

 

살얼음판을 걷는 왕실

화려한 궁정의 이면엔 고민도 많다. 그 중심엔 민심이 왕실에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이 영국왕실의 최고규범이다. 궁정에서 사는 왕족이라도 인간으로서 자유를 누리고 싶다. 그러나 시민이 실망하는 것은 절대로 해선 안 된다. 여기엔 교회도 포함된다. 국교회는 결정적인 순간에 왕실의 선택을 강요한다. 그 요구에 군주도 어쩌지 못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4살 어린 동생 마가렛

 

엘리자베스의 동생 마가렛 공주는 언니에 비해 자유분방하다. 그의 첫 사랑은 궁정 시종장 타운센드 대령. 둘은 궁정에서 몰래 밀애를 나눈다. 타운센드는 부인과 이혼을 하며 공주와 결합되길 꿈꾼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에 정부(Cabinet)와 교회가 반대한다. 이혼남(전 부인이 살아 있는 경우)에 대한 거부다. 마가렛은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 왕실로 돌아온다. 만일 그녀가 타운센드를 고집하면 왕족으로서의 특권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엘리자베스는 처음엔 동생의 결혼에 찬성했지만 결국 왕가의 규범을 지킨다며 악역을 담당한다. 동생에게 공주의 지위를 버릴 것인가 타운센드를 선택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마가렛은 울면서 궁에 남는다.

후일(시즌2) 마가렛은 사진작가인 앤서니 존슨과 결혼한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존슨은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결혼 직전까지 관계를 이어가는 매우 분방한 젊은이다. 마가렛 부부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국인들이 이들 부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왕가의 위기가 찾아오진 않을까.

 

엘리자베스 여왕과 처칠 수상

 

왕은 진짜 군주인가 내각의 꼭두각시인가

영국은 유럽 역사에서 최초로 입헌군주국의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명예혁명(1688) 이후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The King reigns but does not govern)는 원칙을 만들었고 이 것은 유럽의 다른 입헌군주제의 모범이 되었다. 그렇다면 영국의 왕, 현재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무런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것인가.

이 드라마는 군주의 역할이 아직도 일정 부분 강력함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시 수상은 윈스턴 처칠. 당대 최고의 수상이자 세계를 주무른 인물이다. 이런 인물을 여왕이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더욱 엘리자베스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해(기껏 몇 년 간 이튼 칼리지의 부학장을 튜터로 해서 약간의 상식을 배움) 지적 콤플렉스가 큰 여자였다. 여왕이 된 다음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영국 최고의 지성이라 자신의 무식함을 알고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여왕이 모후에게 왜 자기에게 공부를 안 시켰느냐고 따지는 장면이 있다. 그러자 모후는 마가렛은 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왕가의 여성이라 할지라도 20세기 초까지는 고작 배운다는 게 자수, 뜨게질, 왕가규범이었다고 한다.)

 

여왕과 처칠, 처칠은 일 주일에 한 번 버킹엄을 방문해 주요 국정문제에 대해 선채로 딱 10분간 설명하고 돌아갔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처칠을 상대하면서 여왕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는다. 이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엘리자베스를 매우 우호적으로 그렸다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자기 손녀 정도의 여왕 그것도 지적으론 자기와 비교도 안 되는 여자 앞에서 선채로 매주 한 번 국정을 보고하는 처칠... 그 고비를 넘기고 엘리자베스는 점점 정치적 영향력을 높여 간다.

처칠의 후임 맥밀란의 시기엔 동서 냉전이 심화된다. 영연방 중 소련에 경도되는 나라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영국은 지는 해고 소련은 뜨는 해다. 영연방 국가 가나가 소련과 급격히 가까워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미국도 손을 떼고 내각도 포기상태에 들어갔을 때 여왕은 가나방문을 결심한다. 가나에서 그녀는 파격적인 행보로 가나의 친소련화를 막는다. 내각이 하지 못한 외교력을 여왕이 직접 행사한 것이다.

여왕은 맥밀란이 스파이 사건으로 물러나려고 하자 이를 수락하지 않는다. 임명은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하지만 퇴임을 수락하지 않는 것으로 여왕의 권위를 보여준다. 군림은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권위와 국민의 지지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것은 왕의 지도력에서 나오고 그것이 곧 왕의 능력이다. 엘리자베스는 즉위 이후 이 능력을 시험 받는다. 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면 왕실은 안정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왕실의 존립이 위협받는다.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는 필립

 

남편과 신하, 필립 공작

엘리자베스의 부군 필립공작은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그리스의 왕자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망명객의 신세가 돼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엘리자베스를 만난다. 그러나 필립은 국적이 다를 뿐 이방인은 아니다. 그의 외가를 보면 고조모가 빅토리아 여왕이니 엘리자베스와는 8촌의 친척관계다. 필립이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는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친가가 망명객들이니 돈이 없었다. 이런 가운데 그가 가장 사랑하는 누이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다. 어린 시절 큰 충격이었다. 그는 이 상처를 묻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한 사립학교에서 강인한 정신력을 키운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자신만만한 귀족청년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친가가 나치와 가까운 것은 그의 장래를 어둡게 하는 요인이었다. 그의 누이들이 나치간부와 결혼을 했으니 전쟁 중 그가 영국군으로 복무를 했다고 해도 대중으로부터 의심을 받을 위치에 있었다.

불안하면서도 가부장적인 청년 필립은 여왕과 어떤 결혼생활을 할까? 공식적인 관계에선 여왕의 신하로서 생활을 하고 사적인 관계에선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권위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종종 사적인 관계에서도 여왕에게 권위를 양보하는 일이 발생한다. 가장 민감하고 가장 중요한 집안의 결정권은 엘리자베스지 필립이 아니다. 여기서 오는 좌절이 크지만 필립은 곡예를 넘듯 결혼생활을 유지한다.

왕위 서열 1위는 그의 아들 찰스. 찰스의 삶이 후일 알려진 대로 단단하지 못한 것은 아버지 필립의 영향이 크다. 필립은 아들의 유약함을 고쳐보려고 강인한 길로 인도하지만 찰스는 그에 부응하지 못한다. 찰스는 필립의 반대로 귀족학교 이튼 칼리지를 가지 못하고 필립이 어린 시절을 보낸 스코틀랜드의 사립학교로 보내진다. 이 교육기간이 찰스에겐 고통뿐인 기억이다. 스코틀랜드 시절을 생지옥이라고 했으니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컸을까?

필립과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최대의 위기는 아마도 필립의 여자관계였을 것이다. 알려진 바대로 이 드라마는 그 에피소드를 그리며 여왕과 부군이 어떻게 그 파도를 헤쳐 나갔는지를 보여준다. 시즌 2까지 두 번에 걸친 위기가 나온다. 첫 번째 위기는 필립이 왕실전용함정을 타고 여왕을 대신하여 수개월 간 해외순방 길에서 일어난다. 방문지에서 혼외정사가 이루어진 모양인데, 이런 사실이 개인비서의 실수(편지)로 알려진다. 이 위기는 필립의 단호함으로 일단락된다. 절친이기도 한 개인비서를 귀국 길에 가차 없이 해고하고 배에서 내리도록 한다.

또 다른 위기는 엘리자베스의 재위 10년 무렵 발생한 스캔들. 스티븐 워드라는 접골사가 유명인사를 초대하여 환락의 파티를 여는데 거기에 필립이 연루된 것이다. 어떤 언론도 필립이 워드와 연결되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할 때 워드의 자살현장에서 그가 그린 필립의 초상화가 발견된다. 엘리자베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3번째 회임 중이었다. 그녀가 받은 상처는 상당했지만 결국 이 부부는 화해의 길을 걷는다.

필립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엘리자베스에게 있다고 말하며 영원한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한다. 여왕은 필립을 받아들이고 셋째 앤드루를 낳는다. 사랑도 군주제를 지탱하기 위한 수단일지 모른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 둘의 비밀을 누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 여왕과 에드워드8세

 

비운의 사나이 에드워드 8세

영국 현대사에 가장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엘리자베스의 백부 에드워드 8세. 그는 왕위에 즉위한지 1년도 안 돼 사랑하는 여인 심슨 여사를 선택하고 동생(조지6세)에게 왕위를 양위한다. 여기까진 세기의 로맨스. 그러나 드라마는 에드워드 8세에 관한 어두운 이야기가 그득하다. 죽을 때까지 어머니(조지5세의 왕비)와 가족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심슨 여사는 어떤 공적 지위도 인정받지 못했다. 미국과 프랑스를 전전하며 살면서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는 비열한 인간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이어받은 이후 그는 놀기에 지쳤는지 공직을 요구하고 이것은 성사 일보직전까지 간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끝내 그의 요구를 거절한다. 그의 나치부역의 역사가 밝혀진 것이다. 퇴위 이후 나치와 연결돼 히틀러를 지지하고 그 대가로 왕위에 복귀하려는 음모가 비밀문서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왕실가족 사진, 시즌2가 끝나면서

 

왕족은 평민과 정말 다른가

이 드라마를 보면서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공적인 관계에선 왕가의 권위가 넘치지만 사적인 관계에선 왕족도 평민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평민 친구들이 필립이나 마가렛을 대하는 태도는 공작이나 공주를 대하는 그것이 아니다. 그저 친구일 뿐이다.

여왕의 사적 방문이나 왕족들의 나들이도 단출하기 그지없다. 경호원도 경호차량도 보이지 않는다. 군주제가 있는 다른 대륙에선 보기 드문 일일 것이다. 현대의 평등과 민주주의 원조국 영국에서 귀족과 왕족의 존재, 그 속에서 미묘한 갈등과 긴장, 이 드라마는 그 실체가 무엇인지를 흥미진진하게 알려준다.

며칠 쉰 다음 시즌 3와 4를 마저 봄으로써 영국 왕가에 대한 내 의문을 계속 풀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