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두 번 보아도 괜찮은 전쟁영화, <Enemy At the Gate>

박찬운 교수 2021. 2. 13. 09:40

 

 

 

 

성격 탓인지 한 영화를 두 번 보는 일은 좀처럼 없다. 가끔 그런 영화를 만난다면 뭔가 특별히 끌리는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나로선 Enemy At the Gate(2001, 감독 장 자크 아노)가 그런 영화다. 전쟁영화로서의 리얼리티, 흥미로운 스토리 라인, 눈을 고정시키는 명장면... 어느 모로 보나 꽤 괜찮은 영화다. 연휴에 전쟁영화 한 편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영화는 한 소설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윌리엄 크래이그의 소설 Enemy at the Gate: The Battle for Stalingrad. 2차 대전 중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영웅적 공을 세운 바실리 자에체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다. 바실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소련의 병사였고 이 전투에서 저격수로 독일군 225명을 죽였다고 한다.

바실리가 소련의 영웅이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그 외 영화의 많은 에피소드는 허구다. 하지만 이 허구가 영화의 리얼리티를 반감시키지 않는다. 흥미를 유발시키는 영화적 장치라고 보면 된다. 영화는 지극히 사실적이며, 사실과 허구를 분간하기 어렵다.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1943, 스탈린그라드는 현 볼고그라드를 말함)는 2차 세계 대전 중 아니 세계 전쟁사에서 길이길이 기억할만한 최악의 단일전투다. 6개월 간 전투로 200만 명 이상의 사상자 발생했다. 독일은 이 전투를 이겨 캅카스 지역의 유전지대를 장악해 전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으려 했다. 소련이 이것을 저지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국가 전체가 독일군의 군화에 짓밟히지 않으려면 사생결단으로 독일군과 맞서야 했다.


여름에 시작한 전투는 초반 독일군의 절대적인 우세 속에서 도시 대부분이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하지만 소련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한줌도 안 되는 군인들이 도심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사이 겨울이 다가오고 전세는 점점 독일군에게 불리해졌다. 증원된 소련군이 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마침내 독일군을 완벽히 포위해 숨통을 조였던 것이다. 43년 2월 철저히 고립된 독일 제6군은 소련군에 항복한다.

이 전투로 양쪽의 군인들이 각기 50여 만 명이 죽었다. 단일 전투에서 군인 100만 명이 죽은 일은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독일이 일으킨 세계 2차 대전은 이 전투가 분수령이다. 승기를 잡았던 독일은 이 전투로 점점 패전의 길을 걷는다.

 

바실리 자이체프

 

영화의 스토리는 복잡하지 않다. 전세에서 열세에 몰린 소련군에 희망이 필요했다. 영웅적 전사를 탄생시키는 것이 그 방법이다. 이 영웅에 바실리(주드 로)가 낙점된다. 정치장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가 차량전복으로 독일군 앞에서 쓰러져 죽음을 앞 둔 순간 같이 쓰러져 있던 바실리가 그의 총을 빌려 단번에 독일군 다섯 명을 저격해 죽였던 것. 바실리는 저격부대에 소속돼 독일군들을 하나 둘 저격해 가고 독일군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 소식이 선전매체에 알려지자 소련군의 사기는 올라간다.

 

다닐로프와 바실리

 

전쟁 영화가 이런 식으로만 흘러간다면 흥미는 없는 법. 전쟁 속에서도 꽃피우는 것은 사랑. 이 사랑은 전쟁터이기 때문에 더 절실하다. 내일 죽을지 모르니 오늘이 더 소중하다. 바실리의 눈에 들어온 여자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타냐(레이첼 와이즈). 유태계로 부모가 모두 독일군에 의해 무참히 처형되었다.

그녀는 복수의 칼을 갈며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지원한다. 운명의 신의 장난인지 바실리는 타냐가 스탈린그라드를 향해 기차를 탈 때 바로 그 기차 같은 칸에 있었다. 그녀가 책을 읽으며 잠드는 장면을 목격한 바실리의 가슴에 그녀가 각인된다.

 

바실리의 연인 타냐

 

타냐를 사랑하는 것은 바실리만이 아니다. 바실리를 영웅으로 만든 다닐로프. 그는 인텔리 여성인 타냐는 당연히 같은 인텔리인 자신을 좋아할 것으로 생각하나 그녀는 우랄산맥의 목동 출신 바실리를 선택한다.


다시 전투로 집중하자. 독일군으로선 공포의 바실리를 잡을 최고의 저격수가 필요했다. 이 임무를 맡은 것은 저격훈련 책임자 쾨니히 소령(에드 해리스). 그가 스탈린그라드에 도착한다. 그는 한 치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바실리 저격부대를 괴롭힌다. 바실리 주변의 저격병 하나 둘이 그에 총탄에 운명을 달리한다.

아무래도 쾨니히가 우랄 목동보다는 한 수 위임이 분명하다. 바실리도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당은 여전히 그를 영웅시하면서 그가 쾨니히를 잡을 거라고 선전한다. 그 선전의 선봉은 다닐로프. 아마도 그것은 바실리의 생존을 더 이상 바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삼각관계에서 동지는 이렇게 악연으로 돌변한다.

 

 

독일군의 최고 저격수 쾨니히 소령

 

쾨니히와 바실리의 결투 과연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인가. 쾨니히와 다닐로프는 사샤라는 어린 소년을 이용해 정보를 흘리고 사샤는 결국 쾨니히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사샤의 시신이 스탈린그라드 역전에 매달린 것을 본 타냐는 오열하며 쾨니히를 죽이겠다고 총을 들지만 바실리는 이것이 쾨니히가 판 함정이라는 것을 안다.

독일군의 총공세로 타냐도 피난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폭탄 한 발이 그녀를 쓰러트린다. 그 광경을 본 다닐로프는 바실리가 숨어 있는 곳에 가서 자신의 비열함을 고백하고 바실리에게 쾨니히의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머리를 위로 든다. 그 순간, 쾨니히의 방아쇠를 당긴다.


쾨니히는 이로서 자신이 바실리와의 최종 결투에서 이겼음을 감지하고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곧 자신이 죽인 사람이 바실리가 아님을 알게 되나 때는 늦었다. 바실리의 손가락은 이미 방아쇠에 가 있다. 마침내 쾨니히가 쓰러진다.


마지막 장면. 타냐는 죽지 않았다. 중상을 입었지만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다. 바실리가 병원에 도착해 타냐를 찾는다. 병원 관계자들은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그의 눈에 저 멀리 병상에 누워 있는 타냐가 보인다.


이 영화에서 세 장면이 머릿속에 계속 남는다. 두 장면은 바실리의 저격이다. 그가 영웅으로 선발되는 첫 저격. 다섯 발의 실탄을 하나도 헛되이 사용하지 않고 다섯 명의 독일 장교와 병사를 사살한다.

다른 하나는 바실리가 쾨니히를 사살하는 장면.  주드 로와 에드 해리스의 연기가 압권이다. 특히 쾨니히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 모자를 벗는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표시일까, 아니면 승자에 대한 예의의 표시일까?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꽃 피는 법. 병사들이 잠이 든 사이 타냐는 바실리를 찾아 사랑을 나눈다.

 

또 하나 명장면이 있다면 바실리와 타냐의 사랑 장면. 전장에서도 남녀는 서로의 몸을 탐한다. 병사들이 잠든 시간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둘은 몸을 나눈다. 레이첼 와이즈의 연기가 볼만하다. 그 표정 하나하나가 극 사실적이다. 단순한 섹스신이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남자를 받아들이며 절정을 느끼는 그녀의 몸짓과 눈빛이 관객의 가슴에 그대로 꽂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