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어떤 것일까? 나는 리얼하면서도 감동적인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 영화는 대부분 실화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영화지만 실재라고 생각하면, 저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면서, 가슴 속에서 감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예술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실화배경 영화는 다큐영화를 넘어서지 못한다. 인간사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그 수준도 천양지차. 소재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명화가 되느냐 마느냐는 누가 메가폰을 잡고 예술성을 발휘하느냐이다.
우연히 위의 요건을 다 갖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자크 와니쉐 감독의 2013년 작 <빅터 영 페레즈>. 우리나라에서도 개봉은 되었지만(2017년) 영화 정보 사이트를 보니 채 1만 명 관객도 못 모은 것으로 봐, 한국 관객에게 이 영화는 그저 스쳐 지나 간 외화에 불과하다. 아쉽다. 이런 영화가 그리 외면을 당하다니...
이 작품은 튀니지 출신의 천재 복서 빅터 영 페레즈(1911-1945)의 일대기이자 유태인들의 홀로코스트 영화다. 빅터(브라임 애슬라움)는 튀니지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복서인 형 벤자민(스티브 스위사)의 영향을 받아 언젠가 최고의 복서가 되는 꿈을 꾼다. 형이 출전한 경기에서 형이 부상을 입어 경기를 포기하자 빅터는 즉석에서 형 대신 출전해 상대를 단번에 KO 로 눕힌다.
이로서 빅터는 프랑스인 매니저의 눈에 들어 형과 함께 꿈속에서 그리던 파리로 간다. 파리에서 빅터는 연전연승을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 복서가 되고... 드디어 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다.
그러나 때는 히틀러의 망령이 유럽의 하늘을 뒤 덮고 있던 시절. 2차 대전을 맞이해 빅터는 나치에 잡혀 유대인 수용소로 들어가고 마침내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어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그러나 복싱 세계 챔피언의 운명은 수용소에서도 남다른 법.
그곳에서 만난 수용소장은 빅터와 독일병정 간의 복싱경기를 만들어, 빅터를 처참하게 패배시킴으로써 독일인의 우수성을 보여주려고 하는 야비한 사람. 수용소장이 빅터의 상대로 내세운 복서는 헤비급 독일병사. 플라이급이 헤비급을 상대하고, 더군다나 굶주림 속에서 경기를 해야 하는 빅터.
천우신조로 빅터는 수용소에서 형 벤자민과 조우하고 벤자민은 빅터의 트레이너가 된다. 마침내 경기가 개최되고 예상대로 빅터는 일방적으로 밀리고 죽음 직전까지 간다. 그러나 빅터는 포기하지 않는다.
관중으로 동원된 유태인들이 가늘게 빅터의 미들 네임 ‘영’을 부른다. “영” “영” “영” 이 소리를 들은 빅터. 죽어가는 영혼이 깨어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이 반응한다. 그리고 한 방! 독일병정은 링에서 쓰러지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한다. 플라이급이 헤비급을, 유태인이 독일병정을 이겼다.
1945년 초 독일이 패전을 앞두고 수용소의 유태인들은 소련군을 피해 다른 수용소를 향해 죽음의 행군을 한다. 행군 중 빅터가 형에게 마지막 힘을 내 말을 한다. “형, 나는 링에서는 힘이 나지만 걷기는 어려워. 형이 살아가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내가 이겼음을 이야기해 줘. 이제부턴 형이 챔피언이야.” 이 말을 마친 다음 두 형제는 뛰기 시작한다. 빅터는 형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고 그 사이 벤자민은 탈출에 성공한다.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통상의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달리 한 인간의 삶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생존보다 죽음이 오히려 평안하다고 여길 순간에서도 빅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한 순간 한 순간이 기적 같은 삶이고, 신이 허락할 마지막 한 방을 그냥 버릴 순 없었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선 내가 저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죽음의 사탄이 내 주변을 맴돌 때 그냥 그의 손을 잡아? 아니면, 끝까지 실 날 같은 희망을 붙들고 마지막까지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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