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그녀가 ‘지옥의 수레’에서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화차>

박찬운 교수 2020. 8. 20. 21:40



모처럼 한국영화를 한 편 보았다. 2012년 변영주 감독이 만든 <화차>. 시작부터 엔딩까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몰입도 높은 영화다. 2012년 개봉될 당시 상영관에서 꽤 인기를 끌었으니 웬만한 영화팬들이라면 이 영화를 모를 리 없다.

영화를 보고 리뷰를 찾아보니 과연 많은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고 있다. 내용은 대부분 호평일색. 한국 영화 중에 이런 탄탄한 내용과 구성을 가진 영화가 있다는 사실에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는 리뷰까지 보인다.


영화 스토리를 길게 쓸 생각은 없다. 여러 리뷰 중엔 대사 하나하나까지 정리해 이 영화를 심도 있게 소개한 것도 있으니, 스토리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런 리뷰 몇 개를 보면 충분할 것이다. 이곳에선 그저 간단하게 스토리 전개만을 정리해 둔다.

문호와 선영은 결혼을 앞두고 문호의 부모님을 뵈러 마산으로 내려간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사이 갑자기 선영이 사라졌다.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별 소득이 없자 문호는 평소 내왕이 없던 사촌형 종근을 찾아간다. 전직 형사 종근은 불미스런 일로 옷을 벗고 일자리를 구하는 상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지, 종근은 사촌 동생의 사건을 맡아 무면허 수사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미스터리가 하나씩 드러난다.

선영과 문호


(강)선영은 차경선이 신분을 세탁해 얻은 이름. 차경선의 아버지는 사채의 구렁텅이에 빠져 행방불명이 되고, 경선의 어머니는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 만신창이가 된채 시체로 발견된다. 이 비극적인 가정사를 딛고 살기엔 너무나 여린 경선... 하느님이 도왔는지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는 마음씨 넉넉한 총각을 만나 결혼을 한다.

그러나 신혼의 단꿈도 잠간, 사채업자들이 보낸 조폭들이 식당에 들이닥친다. 이들의 온갖 협박에 남편도 경선을 끝내 보호하지 못하자, 경선은 집을 나가지만 조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잡혀 서울로 팔려간다. 얼마 후 누가 아빠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낳지만 아이는 선천성 심장질환으로 죽고 만다.

사채업자가 보낸 조폭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경선


경선은 그 삶에서 벗어나기로 결심. 어떤 방법일까? 화장품 회사의 사원으로 잠시 근무할 때 경선은 고객명단 중에서 자신과 삶을 바꿔치기할 대상 강선영을 찾아낸다. 그 뒤 경선은 선영을 살해하고 그녀의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연인 문호를 만난다.

경선은 자신의 신분이 발각될 상황이 되자, 문호에게서 갑자기 사라지고, 이제 강선영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기 위해 새로운 대상(호두 엄마)을 노린다. 이것을 알게 된 문호는 경선과 호두엄마가 만나기로 한 용산역으로 달려간다. 마침내 거기서 둘은 조우. 곧이어 종근이 도착하고 종근과 경선은 추격전을 벌린다. 용산역 옥상 주차장 마지막 난간까지 달려간 경선, 그녀는 철로를 향해 몸을 던진다.

선영으로 살아가는 경선, 저 모습에 문호는 반한다.


이 영화는 미스터리 스릴러이긴 하지만 보통의 그런 류의 영화처럼 범인이 누구일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영화 시작부터 범죄의 주인공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범인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그 범인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를 조명하는 것. 그게 이 영화 핵심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차경선이란 여인의 일대기다.

영화를 보고나니 여러 가지 생각이 겹친다. 스토리를 떠올리면 우울하기 그지없다. 한 인간이 나락으로 빠지면 살인자 아니 그 이상의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선 등골이 송연해진다.

마각이 드러난 경선, 그러나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문호


용산역에서 경선을 만난 문호가 오열하듯 묻는다. 네가 사람이냐?” 경선이 이렇게 답한다.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 근데 나도 행복해지고 싶었어.“ 관객인 당신은 살인자 경선에게 저주를 퍼부을까 아니면 일말이라도 연민의 정을 느낄까? 문호는 안고 있던 경선을 놓으며 이렇게 한 마디 한다. 떠나라, 붙잡히지 말고.“ 문호의 마음을 이해할 사람은 누구일까? 사람이 진짜 사랑하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불편한 것은 바닥으로 떨어진 한 인간이 회생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경선은 자신의 잘못도 아닌 부모의 빚 때문에 살인자가 되고, 가공인물로서 살아가야 했을까. 과연 지옥으로 가는 불 수레(화차)에서 경선은 내릴 수가 없었을까?

선영을 살해한 경선


부모 빚을 대신 짊어지는 젊은이들이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다간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천형과 같은 삶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억울한 사회제도적 산물이다. 극단적 자본주의 사회제도가 그런 세상을 만들었고, 그런 인간들(사채업자, 사채업자에게서 빚진 사람, 사채업자로부터 청부를 받아 돈을 받아내는 사람)을 만들어 냈다. 태어나면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키워지고, 잘난 부모를 만나든 못난 부모를 만나든, 자신의 꿈을 펼 수 있는 복지국가에선, 이런 영화를 상상하긴 애당초 불가능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원작을 이 영화가 얼마나 잘 소화해냈는지는 소설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평가하기 힘들다. 다만 한 인간의 비극적인 삶과 우리 사회의 구조적 악을 감독 변영주는 영상으로 묘사해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것은 배역을 소화해 낸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살해 대상을 물색하는 경선, 눈이 섬뜩하다


주인공 강선영 역의 김민희의 연기는 출중했다. 김민희 영화를 몇 편 보았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의 김민희는 격을 달리하는 연기를 했다. 그 묘한 분위기, 내면에선 죽음과 살인이 교차하지만, 겉으론 그것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여자, 허공을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악마의 그림자를 찾긴 어렵다. 선영을 살해하고 그 뒤처리를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악마가 되는 자신을 보면서 얼굴을 때리며 발버둥치는 경선을 김민희는 완벽하게 그려냈다.

선영이 사라지자 문호는 필사적으로 그녀를 찾는다.


이선균의 연기도 수준급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순애보적 사랑을 굽히지 않은 문호 역을 잘 해냈다. 얼토당토 한 상황에서도 그런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만은 문호는 지옥의 수레에 올라탄 경선을 하차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용산역 주차창에서 경선이 뛰어내려 죽자 오열하며 그 뒤를 따르려 난간에 오르려는 문호... 신파적인 연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니, 그것은 연기 이상의 연기다.

문호의 사촌형으로 전직 형사 역을 맡은 김종근의 연기도 이 영화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크게 공헌했다. 사실 이영화의 비밀이 풀리는데 종근이 그 열쇠를 쥐고 있었다. 자신의 불행 속에서도 사촌동생의 불행을 감싸면서 진실을 찾고자 하는 열정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선영의 뒤를 캐는 문호의 사촌형 종근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가인 내 눈을 피해가지 못한 장면이 있다. 픽션이라고 해도 그냥 넘어가기 어려운 오류다. 이 영화에서 차경선이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아버지가 진 사채다. 아버지가 행방불명이 되자 사채업자가 보낸 조폭은 경선을 찾아 와 대신 갚으라고 행패를 부린다. 그것이 경선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출발점이다.

전 남편은 ‘경선이 아버지가 죽었으면 상속포기라도 하는 데 행불이라 그것도 못했다. 실종선고 신청을 하면 5년을 기다려야 하니 그 때까지 사채업자들의 횡포를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경선은 빚을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를 죽여 달라고 기도까지 한다.

영화의 마지막...경선이 새로운 살해 대상을 만나기 위해 용산역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온다.



법률적으로 말하면 경선이 아버지 빚을 떠안을 이유가 없다. 부모 빚이 자식으로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은 상식이 아닌가. 경선은 아버지의 빚과는 무관한 사람이니 채무자가 아니며, 조폭들로부터 변제요구를 당할 이유가 없다. 아버지가 사망한 것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경선이 (상속포기를 할 수 없어) 그 빚을 대신 짊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적어도 법률적으론 성립할 수 없다(법률적으로 경선이 아버지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은 사망사실을 알고도 기간을 놓쳐 상속포기를 못했을 경우임).

이 영화에서 법률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조폭들이 아버지 빚이니 자식이 갚아야 한다고 억지를 쓰며 경선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거기에 경선이 굴복했다는 설정이면 족하다. 괜히 부정확한 법률 이야기를 함으로써 오류지적을 받는 것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