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유황도 전투를 보는 두 개의 시선,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박찬운 교수 2020. 9. 5. 21:37

 

 

 

2006 명배우이자 명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두 개 영화를 동시에 만들었다. 그것도 하나의 소재를 두 개의 관점에서 보는 영화를 거의 동시 개봉했다는 것은 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기록이다. <아버지의 깃발><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바로 이 두 영화다.

두 영화는 일본의 섬 유황도, 곧 ‘이오지마’를 배경으로 하는 전쟁영화. 이오지마는 일본 열도의 남동쪽 오가사와라 제도 중 한 섬으로 2차 대전 중 전략요충지. 미국이 이 전투에서 이겨 이 섬을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사이판 기지에서 일본 본토를 향해 출격하는 B-29 폭격기가 임무를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오기 위해선 이오지마를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국이 이곳을 확보할 수 있다면 일본 본토 공격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으로 그 전략적 이익이 막대했다. 일본군 입장에선 이 섬을 잃으면 바로 패전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옥쇄를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다. 그것이 바로 이오지마 전투의 배경이다.

 

이오지마에 상륙하는 미군

 

 

<아버지의 깃발>(Our Flags of Our Fathers)미국 입장에서 이오지마 전투를 본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메가폰을 쥔 것은 그저 승리한 미국을 그리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전쟁영웅이란 정치적 이유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란 것을 분명하고도 적절하게 그렸다.

이오지마 전투는 일본군 2만 여 명이 사망했지만, 미군도 7천여 명이나 사망하는 태평양 전쟁 최대 격전이었다. 당시 미국정부로선 이런 전쟁을 하루 빨리 끝내기 위해선 급격히 늘어가는 전쟁비용을 신속하게 마련하는 게 사활적 문제였다.

이 때 정부고관들 눈에 이오지마 전투에서 미군이 수리바치 산 정상에 꽂은 성조기 사진 하나가 들어온다. 신문 1면을 덮은 그 사진 한 장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깃발을 올린 병사들을 찾아 그들을 전쟁영웅으로 대접한다.

 

이오지마의 수리바치아 정상에 성조기를 꼽는 미군들, 이 사진이 미국 조야를 움직인다

 

미국정부가 이들을 전쟁영웅으로 만든 것은 순수한 목적이 아니었다. 전비 마련을 위한 홍보요원이 필요했던 것. 이오지마에서 승리의 깃발을 올리고 살아남은 3명의 영웅들(위생병 브래들리 존 닥 브래들리, 인디안 출신 아이라 헤이즈, 통신병 레니 개그논)은 트루만 대통령을 만나고 미 전역을 돌면서 국민들에게 호소한다. 전쟁을 이기기 위해선 당신의 돈이 필요하다고(전쟁 채권을 사달라고).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꽂은 병사들이 전쟁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억지스런 전쟁영웅 놀이가 계속될수록 당사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과연 자신들이 전쟁영웅으로 대접 받는 것이 합당한가? 그들의 머릿속은 이오지마에서 죽어간 전우의 모습이 하나 둘 오버랩 된다.

영웅이라면 그들이지 자신들이 아니다, 자신들은 죽음을 피해 용케 살아남은 운 좋은 사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어찌하여 자신들만이 국민적 환호 속에 호의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자괴감이 밀물처럼 찾아온다.

 

 

이오지마의 전쟁영웅에 환호하는 시민들

 

 

더욱 그 한 장의 사진도 연출된 것에 불과했다. 원래 다른 병사들에 의해 성조기가 수리바치 정상에 꽂혔지만, 깃발이 작다는 이유로 다시 큰 성조기를 가지고 가 사진을 찍은 것이 그 영웅놀이의 시작이었다. 최초의 성조기를 올린 병사는 따로 있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3명의 전쟁영웅들....

전쟁영웅들의 삶도 밝진 못했다. 브래들리를 제외한 두 명(아이라와 레니)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잊혀졌다. 전쟁영웅으로 대접받을 때는 죽을 때까지 영웅대접을 할듯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정부도 사회도 이들을 외면했다. 레니는 작은 건물의 관리인으로 생을 마감했고 아이라는 인디언의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고 객사했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Iwo Jima)는 일본인의 시각에서 본 이오지마 전투.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를 통해 그리고자 한 것은 2만 명이 옥쇄하는 군국주의 일본군대가 아니다. 물론 피식민지 백성으로 산 우리들 눈엔 어떻게 그리든 영화에서 일본 군국주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 않지만....(이곳에서 죽어간 조선인 동포가 기 백 명이 된다는 조사 보고가 있음을 상기!)

 

미군 상륙을 바라보는 쿠리바야시 사령관

 

 

영화의 주인공은 이오지마 전투의 일본 사령관 쿠리바야시 중장(와타나베 켄). 그는 미국 주재 일본대사관 무관 경력이 있는 군인으로 보통의 야전군인과는 생각의 깊이가 다른 군인. 그는 이 전투가 자신과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잘 안다. 일본 함대의 지원이 있어야 미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바랄 수 없는 상황.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가급적 길게 전투를 끌어 미군에 최대한 타격을 주고 일본 본토에 시간을 벌어주는 것.


그래서 그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 병사들을 동원해 이오지마를 지하 요새화한다. 그 덕에 1945년 2월-3월 미군의 무자비한 폭격에도 지하 동굴 속에서 살아남은 일본군은 끈질기게 미군을 괴롭힌다. 5일 내로 끝날 전투가 한 달 이상 지속되었다니, 전투 상황이 얼마나 격렬했는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

 

 

이오지마를 순시하는 쿠리바야시 사령관

 

이런 중에 그는 가족에게 편지를 쓴다. 놀랍게도 그 내용은 엄혹한 전장의 군인이 보내는 그것이 아니다. 미국에서의 추억을 쓰고 자상한 남편으로서 자상한 아빠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전쟁 속에서도 인간애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 편지는 전투 중 본토로 가지 못하고 동굴 속에 묻혀 버린다. 그리고 60년 뒤 이오지마 발굴 팀은 이 편지를 발견한다.



거기에 또 한 인물, 사이고(니노미야 카츠나리). 그는 신혼에 징집이 된 병사로 아내는 임신 중. 병영의 분위기는 전투에서 지면 모두 자결한다는 것이지만,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돌아가고 싶다. 전투는 사실상 끝난 상태.

그는 동료 시미즈와 탈영하기로 하고 둘은 진지를 떠나지만, 간발의 차이로 시미즈는 미군에 의해 사살되고, 신의 도움인지, 사이고는 시신 속에서 미군에 의해 발견되어 무사히 후송된다.

 

 

이오지마에서 끝내 살아남는 사이고

 

영화의 재미로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아버지의 깃발> 보단 낫다. 두 영화가 주는 무언의 메시지가 강렬하다. 둘 다 전쟁의 참상을 전하지만, 그 이상의 메시지가 있다.

<아버지의 깃발>은 전쟁영웅이란 따로 없다, 있다고 하면, 전쟁에 참여한 모든 이가 영웅이라는 것.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전쟁은 광기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의 참 모습은 있다는 것.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보아도 좋은 영화들이다. 76세의 노익장으로 영화를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