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가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웅이 될 수 있을까. 내가 그 일을 상당기간 해왔기에 말하지만 그런 법률가가 나오긴 매우 어렵다.
법률가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이고 돈과 권력을 추종하는 성향이 강하다. 법률가는 주로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편에 서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법률기술을 발휘한다. 그렇게 해서 어떤 법률가는 권력가가 주는 조그만 권력에 도취하고, 또 어떤 법률가는 부자가 주는 부스러기 돈에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가끔은 예외가 있는 법. 법이란 세상을 경영하는 수단이고 도구이니 누군가가 이것을 잘만 쓴다면 세상을 조금은 바꿀 수도 있다.
법률가가 많으면 세상은 좋아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연 미국사회가 답을 준다. 세상에 미국만큼 법률가 많은 곳은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변호사 수는 현재 130여 만 명. 인구 약 250명 당 1인 정도. 어딜 가도 변호사가 넘친다. 이렇게 변호사가 많으니 미국은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미국에 변호사가 없어져야 미국이 지금보다 조금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많은 변호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분쟁을 부추겨 법원은 검투사 변호사들의 피 튀기는 경기장이 된지 오래다. 거기에서 정의를 찾는다는 게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인가.
그런 미국의 법조계에도 항상 법률이란 무기로 세상을 바꿔나가는 변호사들이 있다. 이들이 있었기에 미국이란 사회는 무너지지 않았고 그런대로 법률가의 이미지도 절망적이지 않다.
미국은 유난히 변호사 활동영역이 넓어 일찌감치 변호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법정영화가 발달했다. 물론 거기에는 배심제라는 우리가 갖지 못한 사법제도도 한몫을 했다.
우리의 사법절차는 전문법관제이기 때문에 사실 법률가가 아니면(어떤 경우는 그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가 아니면) 재판 내용을 알기조차 힘들다. 물론 요즘 공판중심주의가 정착해 가면서 과거와 달리 법정에서의 공방이 활발해져 가고 있지만 그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에 비해 배심제는 법관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판절차만 주도한다. 사실인정과 재판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법률가가 아닌 일반인으로 구성되는 배심원이다. 형사사건이든 민사사건이든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들은 일반인인 배심원을 설득해야 한다.
그러니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상황은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변호사들의 설득력 있는 언변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영화의 주요한 토대다.
법정영화의 고전적 소재는 골리앗 같은 로펌 변호사를 물리치는 애송이 변호사들의 이야기다. 대표적인 영화가 폴 뉴먼 주연의 <평결 Verdict>.
1982년 개봉된 이 영화는 실패한 변호사로 술에 쩔어 사는 프랑크(폴 뉴먼)가 어느 날 의료사고를 맡는다. 처음에는 일확천금을 노렸지만 사건을 진행하다보니 이 사건이야말로 정의의 심판을 해야 하는 사건이다.
술에 취한 프랑크가 드디어 술잔을 집어던지고 필사적인 노력으로 피고 병원을 대리하는 대형 로펌과 맡선다.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는 게임이었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프랑크의 승리!(참고로 폴 뉴먼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음) 나는 이 영화를 일찍이 보고 변호사의 새로운 세계를 알았다. 변호사도 경우에 따라서는 천국에 갈 수 있음을.
오늘 소개하는 <레인메이커 The Rainmaker>(1998년 개봉)도 플롯은 <평결>과 유사하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90년대 판 <평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는 법정소설가로 유명한 존 그리샴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어렵게 테네시의 멤피스 주립대학 로스쿨을 나온 루디(맷 데이먼)는 로스쿨을 나왔어도 들어갈 법률사무소가 없다. 결국 아르바이트를 하던 술집 사장의 소개로 앰뷸런스 로이어(미국에선 피해자를 찾아 병원 등을 찾아가 사건을 호객하는 변호사들이 있는데, 이들을 앰뷸런스 로이어라고 부름, 변호사 사회에선 질이 좋지 못한 것으로 평가됨) 부르저의 사무실에 책상 하나를 얻는다.
그러나 부르저는 무리한 사건처리로 수사를 받을 상황으로 어느 날 야반도주를 한다. 다행히 도망가기 전에 루디와 사무장 데크에게 각각 5,500불씩을 나누어준다.
루디는 데크를 파트너로 조그만 사무실을 연다. 이 영화의 감초로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바로 데크. 그는 6번이나 변호사 시험이 떨어져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지 못했지만 과거 보험회사 근무경력으로 정보력과 술수가 대단하다. 가끔은 모르는 판사 앞에 가서 변호사 행사도 과감하게 하는 모사꾼.
하지만 하는 짓은 밉지 않다. 이 역은 할리웃의 기린아 키 147 센티미터의 데니 디비토가 맡는데, 그 모습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
루디는 로스쿨 시절 알게 된 급성 백혈병 환자에게 보험금을 거절하는 사건을 맡는다. 환자는 골수이식수술을 받지 못하면 죽게 되는데 보험회사는 요지부동. 보험회사의 대리인은 멤피스에서 가장 유명한 로펌.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는 드럼몬드(존 보이트)는 수하의 변호사(associate lawyers)를 거느리고 현란한 법정기술을 구사한다.
이에 비해 루디는 한번도 법정에서 변론을 해보지 못한 신참. 법정절차도 숙지하지 못해 법정 방청객들에게 뜨악함을 보여 준다. 하지만 정의의 심판은 결국 다윗을 통해서지 골리앗을 통하는 법은 없다.
우여곡절, 산 넘어 산을 넘어 배심원들이 드디어 평결을 선언한다. 원고 승! 거기에다 징벌적 손해배상금이 무려 5천만불. 재미(?) 있는 것은 원고가 피고 보험회사로부터 한푼도 못 받는다는 사실. 보험회사가 이 사건으로 파산을 했기 때문이다. 큰 정의는 실현되었지만 변호사를 만족시키는 돈벼락은 없었다.
이 영화는 <평결>과 달리 약간의 다른 스토리도 가미되었다. 보험회사를 상대로 하는 법정 투쟁 외에 루디가 연민의 정을 느끼는 가정폭력의 피해자 켈리(클레어 데인스)와의 이야기다.
우연히 병원에서 본 켈리를 도와주기 위해 켈리의 집까지 갔다가 남편의 공격을 받는다. 싸움 도중 루디는 남편을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아가는데, 켈리는 루디가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몸을 피하도록 한다. 그리고 남편이 사용하던 야구 방망이로 남편을 때려 목숨을 뺏는다.
루디는 눈물을 흘리며 불쌍한 켈리를 살리겠다고 동분서주하고 그녀의 정당방위 주장이 통해 검사는 기소를 포기한다.
이 영화는 한번 볼만하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만든 장본인은 영화사에 한 장을 기록한 <대부>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그러니 영화를 그냥 적당히 만든 게 아니다. 특색 있는 조연들의 연기력, 몰입감 넘치는 법정 씬 등등은 역시 거장의 작품이다.
또 하나 봐야 할 이유는 주연 배우 맷 데이먼. 나는 맷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는 무조건 본다. 리뷰가 별 볼 일 없다고 해도 손해는 안 본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흥행보증서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나도 한번 루디와 같은 변호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물씬 일어 날 것이다.
이런 영화 이야기는 변호사 수가 급증하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공감도가 확 올라간다. 1980년대 폴 뉴먼의 <평결> 시대에 미국의 앰뷸런스 로이어를 말하면 그것은 진짜 딴 나라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변호사 4만명 시대에 사는 대한민국도 앰뷸런스 로이어는 일상이 되었고 대형로펌이 법조계를 지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개인 변호사가 변호사 1천 명의 김앤장을 상대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명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도 우리 사회에선 그런 사건을 진행하는 변호사들이 있다. 골리앗 로펌이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을 주는 레인메이커(레인메이커는 가뭄 끝에 비를 내리게 하는 사람이니 행운을 갖다 준다는 뜻임)는 분명 있고, 그들이 골리앗 로펌을 무너트린다. 90년대 미국의 상황이 이제 우리의 상황이 된 것이다.(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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