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무엇이 강간인가? 드라마 ‘Anatomy of a Scandal’을 보고‘>

박찬운 교수 2022. 4. 25. 05:35


지난 주말 영화 몇 편을 보았다.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Anatomy of a Scandal. 영국 드라마인데 비동의 간음 강간죄(non-consensual rape)를 소재로 한 6부작 드라마다. 2022년에 나온 따끈따근한 최신 드라마. 영드답게(영화제목에 사용한 anatomy라는 단어 그대로) 묘사와 연기가 세밀하다.

영국 수상을 절친으로 둔 화이트하우스는 옥스퍼드 출신의 장래가 촉망되는 정치인이다. 미남이고 능력자인 이 남자는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이제껏 실패라는 것을 모르고 산 인간이다. 그가 한 사건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렸다. 부하 직원(올리비아 리튼)을 강간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강간하기 전 이들은 몇 달간 불륜관계에 있었다. 그는 강간을 완강히 부인한다. 비록 불륜은 있었지만 결코 비동의 간음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 영화를 여러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지만 비동의 간음 강간죄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 사람들로선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강간죄의 성립과 관련하여 강간의 의미를 ‘항거불능의 폭행 협박에 의한 성기의 삽입‘에서 ’동의 없는 성행위‘로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가 점점 강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매우 시사적이다.

과연 동의(consent)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No means No Rule(거부한다고 했음에도 그 의사에 반해 성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면 강간이라는 것) 혹은 Yes means Yes Rule(동의한다는 명백한 의사표시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성행위는 강간이라는 것)이 그 설명의 기준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실감 나게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피고인과 피해자 사이의 다툼 없는 사실은, 성행위는 의회 내의 엘리베이터 내에서 일어났고 성행위가 일어나기 직전까지 둘이 격정적인 키스를 했다는 것, 피해자도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이후의 행위다. 피해자는 피고인이 삽입을 시도하자 “여기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피고인은 이를 무시하고 “꼴리게 하고 나서 빼지 마”라는 말을 하면서 성행위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화이트하우스는 이를 강력하게 부인한다.

이 영화를 통해 영국인들의 성도덕이 확실히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화이트하우스에게 이런 혐의가 가해지자 이 부부 사이는 위기가 다가온다. 부인 소피의 관심은 남편이 부하직원과 사랑에 의한 섹스를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지나가는 캐주얼 섹스를 했는지다. 전자라면 부부 사이는 파탄이고 후자라면 참을만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법정에서 이 논리는 정 반대가 된다. 화이트하우스는 동의 하의 섹스를 주장하기 때문에 부하직원과의 사랑을 강조한다. 사건도 장기적인 섹스의 일환으로 일어났을 뿐 결코 비동의 간음이 아니라는 변명이다. 법정에서 이를 듣는 화이트하우스의 부인(소피)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또 놓칠 수 없는 사실은 검사역의 케이트 우드크로포트도 불륜 중이라는 사실. 그녀의 상대는 자신의 대학시절 은사로 유부남이다. 이런 불륜섹스는(consensual sex)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극 중 대비일까?

이 영화에서 배심원단은 결국 화이트하우스에게 무죄평결을 내린다. 이것은 비동의 간음 강간이 영국 사회에서도 쉽게 입증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마 우리나라에 비동의 간음 강간이 들어온다고 해도 같은 문제가 생길 것이다. 특히 성행위 중 여자가 그 중지를 요구한 경우가 문제인데,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주장이 수사기관이나 재판기관에서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문제다. 이런 사건은 피고인과 피해자의 상반된 주장만 있을 가능성이 커 결국 피해자의 증언을 신빙성 있는 증거로 채택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러니 피고인을 변호하는 변호사의 전략은 여기에 모아진다. 피해자 진술의 허점을 드러내기 위해 온갖 그 둘의 과거 관계를 들추어낸다. 여기서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는 불가피하다.

이 영화에서 관람객이 눈여겨 볼만한 상황이 더 있다. 검사역의 바리스타 케이트는 화이트하우스가 옥스퍼드 시절 역시 비동의 간음 강간을 했던 상대 피해자다. 그녀는 옥스퍼드를 떠난 다음 리버풀에서 대학을 나오고 이름과 얼굴을 바꿔 변호사(바리스터)가 된다. 만일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의 법률가 인생은 끝장이다. 과거 피해자가 자기 신분을 숨기고 피고인을 기소해 유죄를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극이 끝날 때까지 이런 사실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소피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케이트가 법정에 가지고 온 자료와 서류를 만지는 것을 본 소피는 20년 전 옥스퍼드에서 만난 홀리를 기억해 낸다. 바로 그녀가 남편에 의해 성폭력을 당한 바로 그 피해자다!

이 영화는 화이트하우스의 무죄평결로 끝나지 않는다. 소피는 남편을 통해 알게 된 20년 전의 비밀스런 과거를 언론에 폭로한다. 남편과 수상 톰은 옥스퍼드의 비밀조직 리버틴의 멤버로 당시 파티 도중 친구 하나가 헤로인 중독으로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톰은 친구가 죽기 직전 그와 헤로인을 함께 흡입했고, 화이트하우스의 도움으로 그곳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헤로인은 화이트하우스에 의해 폐기된다. 이 사실이 도하 신문을 장식한다. 톰의 내각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소피가 선택한 정의다. (2022.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