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단상

오후 단상-나의 독락당에서-

박찬운 교수 2024. 6. 28. 14:18

오후 단상-나의 독락당에서-

 

 
이제 성적 처리도 다했으니 방학이 시작되었다. 캠퍼스 여기저기에서 왁자지껄하던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교수들도 어딜 갔는지 연구실 방문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만이 적막강산 절간에 버려진 느낌이다.
 
나는 이 고요함이 좋다.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이 공간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자판을 두드리는 내 모습이 좋다. 이 순간만큼은 돈도 싫고 권력도 싫다. 나의 이 절대적 자유를 그 무엇이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나는 5-6평의 이 공간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군주다.
 
오늘 점심 시간은 멀리 산책을 했다. 뙤약볕을 맞으며 한 시간 이상 걸어 얼마 전 알아 놓은 맛집 하나를 찾아갔다. 장안평에 있는 조그만 노포 국숫집이다. 고기국수로 유명한 이 국숫집은 그 흔한 인터넷 광고 하나 않지만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꽤 유명한 맛집이 된 곳이다. 인심 좋은 사장님은 국수 한 그릇에 사태고기를 한 움큼이나 넣어 주었다. 국수량도 보통 국숫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다. 든든하게 한 그릇을 먹었더니 돌아오는 동안 등에서 연신 땀은 흘렀지만 크게 피곤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점심을 즐긴다.
 
오늘은 어느 날보다 충만하다. 어제 이번 학기 심혈을 기울여 쓴 논문 최종본을 저널에 보낸 여파라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 여러 논문을 써 왔지만 이 논문만큼 만족감을 주는 경우는 없었다. 이번 논문은 창조적이면서도 실용적이다. 실무와 이론 양쪽에 밝지 않으면 쓰기 힘든 글이다. 글을 쓰면서 이 논문은 오로지 나 같은 사람만이 쓸 수 있을 거라고 자위했다. 논문심사 결과도 그렇게 나왔다. 심사위원들은 내 노력을 높이 평가해서인지 3인 모두 ‘무수정 게재‘ 판단을 했다.
 
나이가 들어가니 좋은 점도 있다. 삶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 제일 좋다. 이젠 어딜 가도 눈치를 보지 않는다. 회식이 끝나고 2차를 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 이제 나는 어련히 그런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허구한 날 혼밥을 먹어도 그리 쓸쓸하지 않다. 나이 먹으면 일부러 친구를 찾을 필요도 없다. 고독이란 놈도 꽤나 쓸만한 친구다.
 
이제 본격적인 방학이다. 나는 이곳 나만의 즐거운 놀이터 독락당(獨樂堂)에서 여름을 보내련다. 등에서 부는 선풍기 바람만으로도 이곳 연구실은 충분히 쉴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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