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단상

가을 학기를 맞는 단상

박찬운 교수 2024. 8. 30. 13:54

가을 학기를 맞는 단상

 

많을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내 자신에 충실하면서 의미 있는 일에 조용히 내 능력을 사용할 뿐이다.

 
긴 여름이 지나간다. 지난 여름은 혹독했다. 기상관측 이래 최장 열대야가 지속되었다. 내 기억으로 가장 더웠던 1994년을 능가하는 여름이었다. 그 여름이 가고 있다. 인간이 의식할 수 있는 우주의 최강자는 다름 아닌 시간이다. 시간 앞에서는 어떤 장사도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번 가을 학기 나는 두 개의 강의를 맡는다. 학부 교양 과목 1개, 대학원 과목 1개. 학부과목 수강생은 현재 100명, 조만간 20명이 더 들어올 것이다. 120명, 로스쿨에서 제공하는 제일 큰 강의다. 학교 전체적으로도 가장 큰 대형 강의 중 하나다. 외국인 학생이 4분의 1쯤 되는데, 강의 방법에 어떤 변화를 주어야 그들의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지 고민이다. 대학원 강의에는 6명이 들어왔다. 조촐한 세미나식 강의가 될 것이다. 전반기에는 강의식으로, 후반기에는 발표수업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6명 모두 법학 전공자이기 때문에 모처럼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과목 모두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다. 오랜 강의 경험이 있어 강의 준비에 큰 부담이 없다. 이번 가을은 여유 있게 강의하면서 다른 연구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정년을 이제 3년 남겨두고 있다. 머뭇거리다가는 부지불식간에 지나갈 시간이다. 이 기간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논문은 이제 편수가 중요하지 않다. 공적 삶을 마무리하면서 부끄럽지 않은 글을 몇 편 쓰고자 한다. 우리나라 인권법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본격적으로 정년 후 삶도 계획해야 한다. 학교 밖에 작은 연구 공간을 만들어볼까 한다. 요즘 부동산 시세를 생각하면 상당한 돈이 필요할 것 같다. 인생 후반부 재무계획을 꼼꼼히 세워야겠다.

이제는 많은 것을 소망하지 않는다. 조용히 살면서 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뿐이다. 얼마 전 이곳에 지난 10년간 얻은 지혜를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다시 한번 옮기면서 내 욕망을 점검하고자 한다.

1. 이제는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저 너 하고 싶은 것이나 하라.
2. 주제넘게 이것저것에 관여하지 말라. 너 잘 할 수 있는 것 몇 개만 골라 거기에 집중하라.
3. 작은 일에 신경 써라. 오늘 점심을 어느 식당에서 해결할지가 이곳에서 글 쓰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4. 남의 평가에 연연해하지 말라. 이 공간에서 ‘좋아요’ 수천 개를 받아도 그 글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어제 오랜만에 쿠르드 친구 메르샴을 만났다. 그와 인연을 맺은지 25년이 되었다. 나는 1999년 그의 소송대리인이 되어 난민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이제 한국 국적을 취득해 한국에서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신의 축복이 있길 기도한다.

 
소박한 삶에서 가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겁게 담소하면 영혼의 평안함을 느낀다. 우리는 질투도 시기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서로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나를 알아주는 오랜 친구가 옆에 있음에 신에게 감사한다. (2024. 8. 30)